[컬처토피아] 첫 여성 바둑학과 교수 남치형 초단

국내에서 첫 여성 바둑 교수가 탄생했다. 지난달 26일 명지대 바둑학과 전임교수로 선임된 프로기사 남치형(南治亨) 초단. 올해 나이 만 27세의 젊은 여성이다. “작년 12월 24일에 친구들 만나러 가는 길에 합격 연락을 받았어요. 쟁쟁한 지원자들도 많고 해서 사실 기대를 안 했거든요. 그 날요? 기분 좋아서 친구들한테 크게 한턱 쐈죠.”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가 매력적인 남 초단은 바둑 팬들에겐 케이블 바둑TV의 해설자로도 낯익다. 남씨의 바둑 실력은 15세 때, 여성 최초로 입단대회를 거쳐 프로기사라는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이미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 덧붙여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 대학원에서 중세영문학을 연구했으며 사법시험와 해외 유학 준비 등으로 닦은 지적 편력은 학문으로서 바둑을 연구하고 가르치려는 ‘남교수’의 앞날에 기대를 걸게 할만 하다. 남씨는 아마 2급인 아버지(서예가 남두기씨)의 권유로 취미 삼아 바둑을 두기 시작한지 6년 만에 프로기사가 됐다. “중 3때 한국기원 연수생으로 뽑히면서부터는 오전 수업만 마치고 종일 바둑을 뒀어요. 그저 바둑 두는 게 좋아서 바둑을 직업으로 삼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조건 빨리 프로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막상 프로가 되자, 목표는 사라지고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바둑 인생에 걸림돌이었다. “진정한 승부사는 승패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패배에 대범하지 못했거든요. 승부사로서 살면 불행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결국 고3 때부터 프로기사로서의 이례적인 행보가 시작됐다. 바둑 활동을 접고 대입에 전념한 끝에 94년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것. 남 초단의 서울대 합격은 ‘바둑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과 함께 바둑 조기교육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집중력이 높아지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사고의 깊이나 무게도 생기고…. 머리를 좋아지게 한다기 보단, 있는 머리를 깊이 쓸 수 있게 한달까요. 요즘 문화는 대부분 사람을 가볍게 만드는 쪽인데, 바둑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드는 문화니까요.” 대학 시절 각종 TV바둑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활약한 남 초단은 여류 프로기사 30명 시대를 앞당긴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프로기사로서 남 초단의 ‘외도’는 멈출 줄 몰랐다. 4학년 때는 돌연 사법고시에 도전했고, 1차에 합격한 뒤에는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중세 영문학’ 전공으로 석사를 밟았다.

“프로로 잘 나가고 있었는데 왜 자꾸 딴 짓을 하냐”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남씨의 호기심을 막지 못했다. 그는 도서관에 앉아 고대 문명에 관한 서적부터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섭렵하는가 하면, 인류학 유학을 가겠다며 토플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 바람에 남씨의 바둑은 13년째 ‘초단’에 머무르게 됐지만, 그 때 닦은 교양과 영어 실력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해외 바둑대회가 열릴 때마다 단골로 초청 받았고, 영어로 된 바둑 책을 펴내는가 하면, 20대에 전임교수로 선임되기에 이르렀다. 예전부터 생각해온 ‘바둑의 학문화’를 이룰 기회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바둑교육, 바둑철학 같은 응용학문만 발달해 있고 정작 바둑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거든요. 좀더 본질적인 바둑 연구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들뢰즈가 저서 ‘천개의 고원’에서 몽골 유목민족과 유럽인의 전투 양상을 바둑과 체스를 갖고 분석했듯이, 게임 안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심리나 문화가 들어 있거든요.” 남씨는 올 여름 러시아에서 열릴 국제바둑학술대회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을 연구해서 발표할 계획이다. 남씨는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만도 좋은데 월급까지 받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책 읽는 게 좋다고 불쑥 영문학에 도전했던 10년 전 열정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