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3.15 03:07

동산방화랑 박우홍 대표 소장자들 찾아다니며 그림 구해
조선후기회화展 '옛 그림에의 향수', 겸재·추사… 최초 공개作도 많아

오원 장승업의‘화조기명십곡병(花鳥器皿十曲屛)’앞에 선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자네의 정성이 갸륵하니 내놓겠네. 귀한 그림이니 부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시게."

1년 만이었다. "값비싼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며 그림 빌려주기를 거절했던 80대 수장가가 지난 1월 마침내 서재에 걸려 있던 탄은(灘隱) 이정(李霆·1541~1622)의 대나무 그림 두 폭을 진갈색 누비천에 고이 싸서 내주었다. "소중히 다루겠습니다." 박우홍(59) 동산방화랑 대표는 고개를 숙였다.

대여받은 작품은 검은 비단에 니금(泥金·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으로 가느다란 대나무를 그린 니금세죽(泥金細竹) 두 폭 한 쌍. 조선시대 대나무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던 세종의 현손(玄孫) 탄은의 작품에, 값비싼 재료인 니금을 사용했다는 점, 각 폭이 가로 52㎝, 세로 128㎝의 대작이라는 점, "기유년(1609년) 이른 봄 하순에 월선정(月先亭)에서 그렸다"는 제작연도와 배경이 적혀 있다는 점 등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검은 비단에 금으로 그린 대나무… 탄은 이정의 1609년작‘니금세죽’. 작품의 우측 상단에‘상강야우(湘江夜雨)’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중국의 대나무 명산지‘상강’에 밤비가 내리고 댓잎이 아래로 축축 늘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품 좌측 상단에는 그림을 그린 시기와 장소가 적혀 있다. /동산방화랑 제공
15일부터 서울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리는 조선후기회화전 '옛 그림에의 향수'에는 탄은 이정,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33명의 서화(書畵) 48점이 나온다. 80% 이상이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으로 절반가량은 동산방화랑 소장품이고 나머지 절반은 박 대표가 소장자들을 찾아다니며 삼고초려(三顧草廬)해 빌려왔다.

산수와 화조에 능했던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쌍치도(雙雉圖)'는 냇가에 앉아 있는 장끼와 까투리를 생동감 있게 그린 그림. 서울 어느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이 그림은 "가보(家寶)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소장자를 서너 달 동안 설득한 결과 전시회에 나오게 됐다.

국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아닌 사설 화랑이 대규모 고서화(古書畵) 전시를 개최하기는 쉽지 않다. 소장자들이 좀처럼 작품을 빌려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산방화랑은 박우홍 대표의 부친(동산방화랑 창업주 박주환·82) 때부터 소장자들과 연을 맺어왔고 1980년대부터 꾸준히 고서화 전시회를 열어왔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가능했다. 군 제대 직후인 1977년부터 아버지 화랑에서 잔심부름으로 시작, 2000년 화랑을 물려받은 박우홍 대표는 "1960년대부터 화상(畵商)을 했던 아버지가 '보증서'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세월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수장가의 손을 거치게 된다.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구인가'와 함께 '그림을 소유했던 자는 누구인가'를 짚어보는 것도 옛 그림 감상의 묘미. 이번 전시에 나온 수운(峀雲) 유덕장(柳德章·1694~1774)의 '설죽도(雪竹圖)'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서예가이기도 한 시남(詩南) 민병석(閔丙奭·1858~1940)의 손에 들어갔다가, 구한말 내관 출신으로 대수장가인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1896~1973)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들이 그림 오른쪽 아랫부분에 소장인을 찍어 그림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밝혔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년 무렵)가 화첩에 한 쌍의 게와 송사리를 그린 '어해도(魚蟹圖)'는 을사조약 체결 후 망국의 설움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구한말 문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의 소유였다. 작품은 1938년 경매에 나왔다가 이후 송은 이병직의 손에 들어갔다. 이 밖에 이 전시회에서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소전 손재형(孫在馨·1903~1981) 등 쟁쟁한 수장가들의 손때가 묻은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박우홍 대표는 "이번 전시회는 그림을 파는 것보다는 미술사학도나 우리 옛 그림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위해 5년 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내년에도 조선 후기 회화전을 열 계획이다. 전시회 도록 서문과 작품 설명을 쓴 유홍준 전(前) 문화재청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수표에 이서(裏書)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전시회 출품작이 진품이라는 것을 자신이 보증한다는 얘기다.

▶'옛 그림에의 향수'展, 서울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28일까지. (02)733-5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