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5.08 23:22

박수근 탄생 97주년 특별전… 조덕현의 '오마주'
박수근 그림 주인공이었던 딸 인숙씨를 모델로 작품
박수근 그림 속 아낙네로 재현…
후배 예술가의 존경 담아내

박수근의‘독서’(1950년대). /갤러리현대 제공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맏딸 박인숙(67·전 인천여중 교장)은 어린 시절 박수근 그림의 단골 모델이었다. 박수근의 '독서'(1950년대)와 '아기 업은 소녀'(1960년대)는 모두 소녀 시절의 박인숙을 그린 것이다. 지난 3월 박인숙은 아버지의 고향인 양구의 한 사진관에서 50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 모델을 섰다. 박인숙을 모델로 삼은 이는 사진 속 인물을 정밀하게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작업을 해온 조덕현(54·이화여대 교수)이다.

조덕현은 박인숙의 머리를 쪽찌게 한 후 준비해 온 흰색 광목 한복을 입혔다. 치맛자락은 끌어올려 허리춤에서 끈으로 질끈 묶게 했다. 박수근 그림 속 아낙네 같은 모습이다. 조덕현은 이렇게 찍은 사진을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한복 치맛자락이 그려진 캔버스 아랫부분은 천 뭉치가 흘러내리도록 제작해 그림 속 박인숙이 실제 공간으로 걸어나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의 제목은 '오마주 Ⅰ'. '오마주(Hommage)'는 '존경''경의'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일반적으로 후배 예술가가 거장의 작품 중 주요 장면을 본떠 표현하는 행위. 조덕현의 '오마주' 작업은 박수근에 대한 '경의'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오마주Ⅰ'은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서 박수근 탄생 97주년 특별기획전 '박수근과 조덕현:사실과 기억의 편린, 20세기 한국 여성사를 보다'에 전시됐다. 이 특별전의 한 부분으로 개인전 '오마주'를 열고 있는 조덕현은 "박수근의 '독서'와 '아기 업은 소녀'를 보고 그림 속 소녀의 현재 모습이 궁금했다. 박수근이 모델로 다뤘던 대상을 나도 다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한편으로는 박수근과는 다르게 '내 식대로' 해보고 싶다는 치기도 발동했다"고 말했다. 박수근 작품의 등장인물 중 70~80%는 여성이고, 조덕현은 1991년 딸이 태어난 후부터 여성 이미지에 천착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조덕현은 현재의 박인숙을 모델로 한 '오마주 Ⅰ'의 맞은편에 박인숙의 고등학교 때 사진과 박수근의 40대 때 사진을 합성해 만든 얼굴을 그린 '오마주 Ⅱ'를 배치했다. 나이 든 박인숙이 젊은 시절의 자신과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아버지의 DNA를 직시하도록 한 셈이다.

“내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지다니 마치 시험에라도 합격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박수근의‘독서’(1950년대) 속 어린 소녀 박인숙(사진 왼쪽)은 어느새 나이 70 가까워 아버지 그림 속 아낙네 차림으로 조덕현(사진 오른쪽)의‘오마주Ⅰ’(사진 가운데) 모델을 섰다. /양구=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전시회에는 이 밖에 박수근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나목(裸木·잎이 다 떨어진 겨울 나무)'을 찍은 사진 32점과 다양한 연령대의 1960년대 강원도 여성들의 얼굴 사진을 합성해 박수근 작품 속 여인들처럼 익명성을 살린 '오마주 Ⅲ' 등이 나왔다. 조덕현은 "박수근에게 '여성'이란 전쟁 전후의 어두운 시대를 견딜 수 있도록 한 '희망의 끈'이었고, 그 점이 내가 여성을 다루는 이유와 참 많이 닮았다"며 "전시를 통해 박수근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 기간 동안 옆 전시실에서는 지난 3월 미술관이 새로 구입한 유화 '마을'(1964)을 비롯한 박수근의 유화·드로잉과 박수근이 1959~1961년 잡지 '장업계'에 그린 여성 관련 삽화 등이 전시된다. '독서'와 '아기 업은 소녀'는 오프셋 판화로 전시된다.

개막일인 3일 전시장을 찾은 박인숙은 자신을 모델로 한 조덕현의 작품을 보고 "늘 가족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던 아버지, '미술 숙제를 도와 달라'고 하면 '네 힘으로 스스로 해야 하는 거야'라고 웃으며 충고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뭉클하다"고 말했다.

'박수근과 조덕현:사실과 기억의 편린, 20세기 한국 여성사를 보다', 9월 30일까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 (033) 480-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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