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 그와의 인연은 드문드문 이어졌으되 그의 인생은 굽이쳤다. 1971년 '아침이슬'을 담은 '김민기 1집'을 낸 그는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꽃 피우는 아이'를 불렀다. 화근(禍根)이었다. 이 노래의 애잔한 가사를 당시 정권은 저항적이라고 판단했다.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중략)/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꽃피우던 아이도 앓아 누웠네/누가 망쳤을까 아기의 꽃밭/그 누가 다시 또 꽃피우겠나(후략)'라는 내용이었다. 1집 앨범이 전량 폐기됐다. 마스터 테이프도 빼앗겼다.
그때부터 그는 연극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3년엔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이듬해 소리굿 '아구'를 내놓고 군에 입대, 1977년 제대했다. 그러곤 그는 몇 년간 서울을 떠나 고향 전북 김제시에 거주했다. 거기서 수확한 감자나 고구마를 보내오곤 했다. 쌀을 보내면서 쌀값을 달라기도 했다. 연극 활동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느 하루는 그가 집에 놀러 왔다. 함께 술을 마셨다. 당연히 집에서 자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저녁 10시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5000원만 달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어디 가는데?" "탄광이요. 청량리에서 태백 가는 기차를 타야 돼요." "거긴 왜?" "한 석 달 정도 있으면서 일하려고요."
후에 알았다. 태백 탄광에선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사회 운동가로 보이는 김민기가 그들 탄광에서 일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태백을 떠나 충남 보령 탄광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여러 달 광부들과 생활했다.
그렇게 훌쩍 떠나곤 다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불쑥 나타났다. 김민기의 성격이 그랬다. 서울 대학로의 '학전' 대표로 자리 잡고 나서야 우리는 종종 만났다. 그리고 지난 3월 30일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 나, 조영남, 양희은 등이 모두 학전소극장에 모였다. 그의 환갑 생일과 학전 개관 20주년을 기념한 자리였다. 일찌감치 "나는 가수가 아니다"고 선언한 그는 그 자리에서도 '봉우리'의 가사를 낭독했을 뿐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세상은 그를 저항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가 '아침이슬'을 발표한 1970년을 저항 문화의 시작이라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내가 아는 김민기는 이와 거리가 멀다. 그는 서정적이고 해학적이다.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견을 주장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귀한 민기'다. 우리 모두 그에게 공연장 하나 지어주는 꿈을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