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의 맛 세상] 태조 이성계는 순창고추장을 맛봤을까

    입력 : 2012.01.26 23:17

    "이성계가 먹고 반했다" 순창고추장 대대적 홍보
    서양 요리·와인업계에선 일찍부터 '스타 마케팅'
    이성계가 맛본 건 고추장 전신인 초시…임금까지 동원한 마케팅전략은 환상적

    김성윤 · 대중문화부 기자
    '스타 마케팅'이란 게 있다. 연기자나 가수 등 유명인사가 먹거나 입거나 쓰는 물건이라면서 홍보하고 광고하는 것이다. 스타의 유명세를 이용해 상품을 더 쉽고 빠르게 대중에게 알리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기법이다. 한국만의 현상도, 최근 현상도 아니다. 서양에서는 더 오래전부터 스타 마케팅을 적극 활용해왔다.

    유럽 요리업계는 스타 마케팅을 특히 활용한다. 서양요리 체계를 확립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Escoffier· 1846~1935)를 포함한 여러 요리사들은 새로 만든 요리를 유명인사에게 '헌정'한다며 그들의 이름을 요리에 붙였다. '피치 멜바(Peach Melba)'는 에스코피에가 당대 최고 소프라노 가수였던 넬리 멜바를 위해 1892년 만든 디저트이다. '투르느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한 프랑스 요리사 앙투안 카렘(Careme)이 작곡가 로시니를 위해서 만든, 푸아그라와 송로버섯을 넣은 스테이크 요리이다.

    와인업계도 스타 마케팅에 적극적이다. 샴페인의 경우 돔 페리뇽(Dom Perignon)이 스타 마케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샴페인은 가톨릭 사제로 프랑스 오비에(Hautvillers) 수도원 와인저장고 책임자였던 돔 페리뇽이 처음 만들었다고 흔히 알고 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딴 고급 샴페인도 있다. 하지만 페리뇽 신부는 샴페인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가 샴페인 발전에 기여하기는 했다. 두꺼운 유리병을 도입하고 코르크 마개를 끈으로 고정시켜 기포로 인한 압력 증가로 터지기 일쑤였던 샴페인병 파손을 줄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에도 불구하고 병이 계속 터져 페리뇽 신부가 관리하는 샴페인의 절반을 버렸다고 한다.

    프랑스 샴페인업계는 돔 페리뇽이 샴페인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려고 나서지 않는다. 가톨릭 수도사가 와인에 기포가 생기게 했다는 전설이 샴페인의 탄생 배경에 신비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홍보대사를 선발하거나 마스코트를 일부러 만들기도 하는 마당에, 페리뇽 신부만큼 샴페인을 대표하기에 적합한 인물을 다시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우리나라에서도 음식계는 스타 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순창고추장을 맛보고 극찬했다는 이야기다.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마을 홈페이지는 '순창고추장의 유래'를 이렇게 소개한다. "고려말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기거하고 있던 순창군 구림면 만일사를 찾아가는 도중, 어느 농가에 들러 고추장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 맛을 잊지 못하다가 조선을 창건·등극한 후 진상토록 하였습니다. 이후에 천하일미의 전통식품으로 유명해졌으며 지금까지 그 명성과 비법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안정마을뿐 아니라, 많은 순창고추장 제조·판매업체가 이 설화를 내세운다. 인터넷에서 순창고추장을 검색하면 이런 내용이 무수히 뜨고, 언론도 사실처럼 전한다. 최근 한 일간지는 '순창 장류 축제' 기간에 열리는 '순창고추장 임금님 진상행렬'을 소개하면서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기거하던 순창군 구림면 만일사를 찾아가는 도중 농가에서 먹은 고추장 맛을 잊지 못해 진상하도록 해 유명해졌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주장은 언뜻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는 고려말인 1335년에 태어나서 1392년에 조선을 세웠고, 1398년까지 통치하다 1408년에 사망했다.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찾아오다가 고추장을 맛본 건 늦어도 1391년 이전이라야 한다. 그런데 고추장의 주요 재료인 고추는 17세기 초 일본에서 한반도에 전해졌다고 한다. 고추장이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건 1766년 발간된 '증보산림경제'로, '만초장'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성계는 고추장을 맛보기는커녕 고추장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순창고추장을 맛보고 극찬했다는 설화의 진실은 무엇일까. 순창군청 웹페이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나러 만일사에 오다가 농가에서 맛있게 먹은 건 고추장이 아니라 '초시(椒�f)'라고 순창군은 설명한다. 초시는 산초(山椒)나 호초(胡椒·후추나무 열매껍질)를 넣은 된장류로, 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고추가 전래된 후 산초나 호초 대신에 고추를 넣은 것이 고추장이다.

    순창군은 이성계가 고추장이 아니라 고추장의 전신을 맛보았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하지만 굳이 이런 사실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일개 연예인이 아니라 임금님이 맛있게 먹었다니, 이보다 더 환상적인 스타 마케팅 소재가 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