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알려지자 다른 신문도 일제히 '포악한 미 선교사' '만행 미인(米人)'의 행동을 성토했고, 현지 청년들이 장날 '배척 연설회'를 연 것을 필두로(6월 30일자) 평양 경성 목포 마산 등 전국으로 규탄대회가 확산되면서 반미 감정이 번져갔다. 경찰은 사법권 발동을 결의했고, 놀란 안식교회 지도자들은 "우리 잘못을 알음으로 전세계 인류 압헤 사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허시모도 피해자 가족에게 위자료를 합의하는 한편 신문에 사죄 광고를 냈다. '하바-드'대학에서 외과와 피부과를 전공한 경성 의사 최영재(崔永在)는 현지로 달려가 소년의 치료에 나서는 등 온 관심이 미국인의 만행에 쏠렸다(7월 3~8일자 등).
그런데 일본 낭인(浪人)과 친일조직인 상애회(相愛會)가 '일선융화'를 내세워 반미 감정에 기름을 붓는 '이상히 격분한 태도'로 전례 없는 행동을 취했다. 조선일보는 이에 1면 논설을 통해 '일대 민족적 해학(諧謔)'으로 '식자(識者)의 고소(苦笑)함을 금치 아니할 바'라 꼬집고, '반세기에 뻐치어 거의 전례가 업는 민족적 우정을 가지든' '미인은 의연히 선린(善隣)'이라고 주장했다(7월 8일자).
초미의 관심 속에 열린 공판에서 검찰은 허시모에게 '(염산이 아닌) 초산은으로 전치 6개월의 상해를 입힌 죄'로 징역 3개월의 실형을, 판사는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했다(8월 6, 28일자 등). 검사가 불복, 상고심까지 갔으나 결국 집행유예가 확정돼 그해 12월 허시모는 귀국했다. 일본인의 과장된 분노를 '민족적 해학'이라고 꼬집은 것을 증명이나 하듯 '경남 마산시에 제2 허시모 사건'(7월 11일자) '부산에서 발생된 제2 허시모 사건'(8월 27일자) 같은 일본인에 의한 어린이 학대와 만행은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