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월드컵과 사법시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잉글랜드 첫 경기가 영국 시각 일요일 아침 10시 30분에 열렸다. 경기를 앞두고 영국성공회가 전국 교회에 예배 시간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아니면 신자들이 교회에서 경기를 보도록 대형 TV를 놓으라고 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이탈리아 피아트 공장 근로자들은 파라과이전(戰)을 보려고 두 시간 파업을 벌였다. 브라질에선 학교까지 문을 닫고 병원들은 급하지 않은 수술을 미뤘다. 월드컵에 빠지면 예배도 공부도 일손도 건성이 된다.

▶잉글랜드가 1966월드컵에서 우승하자 이민 떠나는 영국 사람이 확 줄었다. 4년 뒤엔 4강에도 못 들자 이민자가 급증했다. 브라질 프로축구에선 승리한 팀이 소속된 도시의 이튿날 공장 생산율이 12% 오르고, 패하면 사고율이 16% 증가한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에선 2002월드컵 이듬해 봄 신생아 출산이 반짝 늘면서 출산율이 1.17에서 1.19로 올랐다. 출산율은 다시 추락하다 2006월드컵 다음해 1.13에서 1.26으로 치솟았다.

▶'월드컵 효과' 중에 유별난 것이 시험 점수 하락이다. 2002월드컵 두 달 뒤 모의 수능시험에서 상위 50% 평균 점수가 2001년보다 인문계는 9.2점, 자연계는 15.7점 낮았다. 수능 점수도 인문계 7.1점, 자연계 8.6점 떨어졌다. 그 해 고3 6000명에게 "수능 준비를 가장 많이 방해한 사건"을 물었더니 58%가 '월드컵 열기'를 꼽았다.

▶여자들은 '남자가 군대 가서 축구 한 얘기'를 제일 따분해한다. '군대스리가'라는 말도 있다. 스포츠엔 남자가 더 열광하게 마련이다. 월드컵이 끝나자 "선생님 얼굴이 축구공으로 보였다"는 남학생이 많다. 따로 통계는 없지만 남학생 점수 하락폭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낀 해에 고3 아들 둔 엄마들은 속을 끓인다. 실제로 2002월드컵과 겹친 사법시험 2차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17%에서 24%로 껑충 뛰었다. 수석·최연소·최고령 모두 여자였다.

▶속설로만 떠돌던 월드컵과 남녀 시험 성적 사이 함수관계를 서울대 박종희 교수가 밝혀냈다. 2006년과 2010년 사법시험에서 남자 수험생들이 월드컵에 한눈을 파느라 여성 합격률이 도드라지게 높았다고 한다. 박 교수는 두 차례 월드컵 덕분에 늘어난 여성 법조인을 106명으로 계산했다. 안 그래도 여성이 모든 분야에서 눈부시게 약진하고 있다. 가장 남성적인 스포츠 축구가 '모계사회 회귀'에 단단히 한몫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