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의 은퇴자 커뮤니티 AARP. 시니어에게 실질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나아가 사회 곳곳의 변화를 주도하는 AARP는 시니어 관련 사업에 뛰어든 전 세계 기업들이 가장 이상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꼽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들여다보자.
세계 정치의 중심지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는 3대 로비단체가 있다.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전미총기협회(NRA), 미국은퇴자협회로 알려진 AARP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중 AARP는 조직규모나 로비자금 면에서 미국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AARP의 회원 수는 무려 3800만 명. 이는 미국 전체 유권자의 약 20%로, 정치권이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체임을 알 수 있다.
정치권이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정책 발의 또는 변경을 위해 필수적으로 AARP의 의견을 확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AARP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고령자를 위한 권익 보호는 물론, 고령자에게 친화적인 사회를 조성하기 위한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인구 고령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AARP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령자 대상의 커뮤니티 운영 방식, 기업과의 사업제휴 모델, 인터넷이나 잡지를 통한 시니어 미디어 사업, 미국 내 주요 도시를 순환하며 상·하반기로 개최하는 시니어 박람회 사업 등은 비영리단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채롭다. 전 세계 기업들이 가장 이상적인 시니어 비즈니스 모델로 AARP를 벤치마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질적인 가능성을 위한 동반자
1958년에 설립된 AARP는 국내에서는 아직 편의상 ‘미국은퇴자협회’라고 부르지만, 정작 AARP는 몇 년 전부터 모든 공식 문서에 협회의 전체 명칭(Americ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이 아니라 약칭(AARP)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책을 변경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협회가입 대상을 은퇴자로 한정하지 않으며, 중·고령자 전체의 권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AARP의 의지가 담겨 있다.
AARP 국제부 브래들리 셔먼 수석 고문은 이와 관련해 “우리는 더 이상 은퇴자만을 대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 않으며, 시니어의 은퇴 여부와는 관계없이 50세 이상이 되는 이들을 위해 열려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이어 “이러한 변화는 AARP가 그 활동영역을 국제무대로 넓히기 위해 ‘미국의 은퇴자만을 위한 단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덧붙인다. AARP는 2013년 들어 AARP에 대한 이 같은 변화를 홍보 활동에도 적용하고 있다. ‘실질적인 가능성을 위한 동반자(An Ally for Real Possibilities)’라는 새 슬로건에서 AARP 단어의 새로운 뜻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 고령화 이슈에 대응
고령화는 이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AARP는 전 세계 고령화 이슈에 대응하는 기관으로 탈바꿈 중이다. 작년부터 AARP가 세계보건기구(WHO)와 함께 전 세계를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령친화도시’ 인증사업을 예로 들 수 있다. 현재까지 미국내에서 뉴욕을 포함한 6개 도시가 인증을 받았으며, 서울도 작년부터 추진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해당 인증사업 참여를 준비하고 있다. 아울러 다른 사업에서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시장 진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셔먼 수석 고문은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인 인구 증가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며 “아시아권에서도 특히 한국과 중국의 이민 1세대 대부분이 현업에서 은퇴한 시니어가 되었으며 이들은 AARP에게 매우 소중한 가망 회원이자 자산”이라고 말한다. 실제 AARP는 지난해부터 아시아계 미국인을 전담해 대응하는 부서를 설립, AARP 회원 가입을 독려하고 있다. 또한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의 현지 기업 및 기관과의 협력관계를 넓히고 있다.
이러한 AARP의 정책 변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 시니어 산업 발전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노년은퇴설계지원센터 한경혜 교수는 “AARP의 활동은 국내 학계는 물론이며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으로부터 인구 고령화 이슈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대응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며 “고령친화산업의 성장에 대한 과도기를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AARP와의 적극적인 교류가 바로 산업 성장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AARP는 전 세계 은퇴자 커뮤니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미국 인구의 약 12%, 유권자 규모로는 20%가 AARP의 회원이다.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이 13.1%인 것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은퇴자들이 AARP에 가입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이 많은 사람을 한 곳으로 모이게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회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AARP에 가입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50세 이상이면서 수중에 16달러(1년 연회비)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누리는 혜택은 그 이상이다. 최대 3%에서 1%까지 신용카드 사용액의 포인트 적립, 호텔과 리조트 등 여행 관련 서비스 할인, 쇼핑몰과 레스토랑 등 생활 서비스 할인 등 경제적 혜택이 제공된다. 또한 전문가 재무 상담 무료 제공, 일자리 상담, 은퇴 설계 등 부가적인 혜택도 있다. 이 밖에 은퇴 생활에 도움이 되는 잡지나 회보 등의 출판물을 무료로 제공하며, AARP와 제휴 계약을 맺은 보험사나 금융사의 은퇴 관련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AARP 회원들이 누리는 혜택은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권리를 AARP가 지켜준다는 믿음이 무엇보다 크며, 회원들의 소속감을 높여준다. AARP는 은퇴자들의 이익을 위해 설립된 조직답게 은퇴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은퇴자의 이익에 반하는 법령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공청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회에 압력을 가한다. 백악관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AARP 건물의 위치가 이러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AARP는 또 은퇴자들의 소비자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선 회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과 여러 형태의 제휴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단순하게 제품 가격을 할인해주는 제휴 서비스에서 은퇴자들을 위한 별도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기업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불합리한 기업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펼치고 있다. 회원이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이 있을 때, 그 회원은 기업이 아니라 AARP에 그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기업은 3800만 명의 고객을 잃고 싶지 않다면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소비자 집단으로서 획득한 기업 대상의 강한 협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