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在獨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씨 인형에 담은 나의 삶·나의 가족

    입력 : 2013.07.19 13:50

    내 나이 일흔,엄마 노릇 졸업하자 다시 찾아온 사랑

    고희(古稀) 기념 전시회를 시작한‘닥종이’인형작가 김영희.
    고희(古稀) 기념 전시회를 시작한‘닥종이’인형작가 김영희. 독일에서 다섯 자녀를 모두 성인으로 독립시킨‘한국 엄마’는 일흔 나이에 다시 연애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金永喜)를 만난 것은 고희(古稀) 기념전시회를 이틀 앞둔 17일이었다. 전시회 제목은 '김영희의 아이들'.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에, 그를 인터뷰한 건 전시회 홍보를 도와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김영희를 만나기 전, 그가 쓴 책 '엄마를 졸업하다'(2012년 출간)를 읽으면서 뜻밖의 생각을 한동안 했다.'한국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예술 문외한인 나에게 김영희는 작품과 인생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도는 사람이다. 토속적 소품을 장착한 동그란 닥종이 인형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소박한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김영희의 인생은 언제나 전투적인 서구형으로 기억됐다. 남편을 사별한 아이 셋 딸린 작가가 열네 살 연하의 독일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돌연 유럽으로 떠난 영화 같은 스토리. 20년 전 베스트셀러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를 통해 이미 진부할 만큼 유명해진 이야기였다. 이런 여자라면 지금쯤 자식을 '독일 병정'보다 더 독일적인 인간으로 키우지 않았을까.

    김영희는 인터뷰 도중, 20년 전 책을 가리키면서 "이 책에선 예쁘게 썼지만…"이란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 현실이 변하면, 과거의 기억도 달라진다. 독일에 건너가 낳은 넷째·다섯째 아이의 평탄치 못한 삶, 냉철한 독일 육아법을 거부한 따뜻한 한국 엄마와 차가운 독일 아빠의 갈등, 영화 같은 출발과 달랐던 냉정한 현실과 이혼. '엄마를 졸업하다'는 20년 만에 예쁜 포장을 걷어낸 실존(實存) 스토리에 가까웠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희망의 냄비’이고있는 김영희씨와 다섯 자녀 큰 사진 속 작품‘자화상’은 대학생 남편을 따라 무작정 독일로 갔을 때 아무것도 없이 벌거숭이였던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큰 냄비는 책임져야 할 식솔, 냄비 속 푸른 싹은 희망을 상징한다.
    ‘희망의 냄비’이고있는 김영희씨와 다섯 자녀 큰 사진 속 작품‘자화상’은 대학생 남편을 따라 무작정 독일로 갔을 때 아무것도 없이 벌거숭이였던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큰 냄비는 책임져야 할 식솔, 냄비 속 푸른 싹은 희망을 상징한다.
    "'변을 못 가린다는 이유로 토마스(독일 남편)에게 시어머니가 찬물, 뜨거운 물을 엉덩이에 퍼부으면서 혼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도 제 아이한테 똑같은 행동을 했다. 어릴 때 프란츠(막내아들)가 변을 못 가리자 엉덩이에 뜨거운 물, 찬물을 마구 들이부었다. 나는 벌게진 아이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펑펑 울었다. 큰딸 유진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아이 키울 때 아이가 똥오줌 가려서 스스로 기저귀 빼낼 때까지 내버려 둬.'"

    김영희는 '철혈(鐵血) 육아법'으로 유명한 독일에서 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한국 엄마' 방식을 관철하면서 다섯 아이를 성장시켰다.

    연하 남편을 여섯 번째 자식처럼 달고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린 것도 김영희였다. 떠돌기만 하던 젊은 남편과 이혼하고 성인(成人)이 된 막내를 품에서 내보냈을 때를 그는 "엄마를 졸업했다"고 표현했다.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날개를 달고 세상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이를 졸업한' 김영희는 다시 연애(戀愛)를 시작했다. 열네 살 연하의 독일 남자와 이혼한 김영희가 이번에 선택한 남자는 동갑의 '한국 남자'. "독일에서도 똑똑한 사람은 동급(同級)을 사귑니다, 하하." 인생의 긴 포물선을 그리면서 그는 다시 '한국 아내'로 돌아오려는 것일까. 김영희는 "내가 살아가는 힘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단순한 사고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사진은 먹여 살려야 할 다섯 자녀를 형상화한 것.
    사진은 먹여 살려야 할 다섯 자녀를 형상화한 것. 왼쪽부터‘고기잡이(막내 프란츠)’‘햇볕 쬐기(넷째 봄누리)’‘장수의 호박(셋째 장수)’/ 김연정 객원기자
    '고기잡이'

    김영희의 삶에 관심이 있다면 이번 전시회에서 주목해서 볼 작품이 '고기잡이'란 인형이다. 정신적 장애를 가진 막내 프란츠(22)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언젠가 자립해서 고기 잡으러 나가라는 소망을 담았다"고 그는 말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늦둥이 막내는 공포증과 환각에 시달렸다. "어렸을 때부터 30명 넘는 정신분석학자를 만났어요. 제가 독일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던 때였는데도 유명하다는 심리학자면 모두 찾아다녔죠. 자폐증이라는 판정이 나오면 자폐증 전문시설을 찾으면 되는데, 막내는 그것도 아니었어요."

    막내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엄마와 아빠의 대응법은 달랐다. 학교에서 몰매를 맞고 돌아온 프란츠 앞에서 한국인 형은 "어떤 놈들이야? 내가 때려줄게!" 하고 나섰지만, 독일 아빠는 냉정하게 말했다. "모자라니까 애들한테 맞지. 다 제 탓이야."

    김영희는 닥종이 인형 작품을 판 돈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막내와 함께 터키, 이집트, 유고슬라비아를 여행했다. 독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아이를 벗어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상은 심해졌다.

    "부모의 불화와 이혼이 프란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듯하다"고 김영희는 말했다. "누구 집에 쥐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다 아는 작은 동네예요. 금방 소문이 나서 학교 아이들의 조롱을 많이 받았어요."

    김영희는 독일식 육아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는 방식에 내 아이를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여자가 책 보고 독일 사람을 흉내 낸다고 되나요? 아이는 달걀 노른자와 비슷합니다. 찌르면 터진다고요.

    울면 안아주고, 밤에 끼고 자고. 독일 엄마는 대개 우유로 아이를 키우는데 나는 다섯 아이를 모유로 키웠어요. 요즘은 좀 덜해졌지만, 독일은 차가워요. 내가 모유를 먹이니까, 소처럼 보더라고요. 독일 부모는 아이가 우유를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그냥 소리없이 가둬요. 절대 큰소리를 안 내죠. 겉으로 보면 나라가 조용해요. 그런데 차갑습니다."

    다음은 책의 한 대목.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은 아이와 잠자리도 따로 하며, 우유 먹이는 시간도 네 시간 간격을 철저히 지켰다. 하지만 나는 늘 업고 안고 다니며, 애가 울면 시도 때도 없이 젖을 물리면서 일했다. 독일인 시어머니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희는 제 자식을 왕으로 생각하나 봐. 돈도 없으면서 윤수(첫째 아들)에게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지 않나. 프란츠도 땅에 안 내려놓고 사니, 커서 뭐가 되려고.'"

    사진은 먹여 살려야 할 다섯 자녀를 형상화한 것. ‘지휘자(둘째 윤수)’‘마술 하는 아이(첫째 유진)’. / 김연정 객원기자
    김영희는 "원숭이도 엄마가 끼고 다니는 새끼가 커서 강해진다"고 말했다. "독립적으로 큰 원숭이는 약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도 그렇다고 믿어요. 큰딸은 '독일 사람들이 (특별한 육아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그런다'고 해요. (독일 남자와 결혼한) 큰딸도 자기 자식을 끼고 자요. 한국식으로." "그런데 지금 독일이 더 강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한국도 강해졌지요. 밖에서 보면 기적적인 나라예요"라고 말했다.

    막내는 말 사육사를 희망했다. 하지만 자식 걱정에 허락하지 않았다. 동물과 교감(交感)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기복이 큰 아이예요. 지나치게 가까이하다가 큰 동물에게 밟힐 수 있어요." 대신 그를 직업연수원에 보냈다. 요양원을 겸한 사설(私設) 연수원이었다. 한 달에 6000유로(900만원)를 받는 곳이다. "엄청난 돈이죠. 그런데 그 돈을 국가가 부담해요. 나라가 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죠. 독일의 좋은 점입니다."

    그는 성인이 된 막내를 품에서 내보냈다. 위 네 형제처럼 그에게도 금전 지원을 끊었다. 막내는 직업훈련원에서 물건을 만들어 극장 가는 돈 정도는 스스로 벌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것에서 '행복'을 아는 아이예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오늘 참 행복하다'고 느끼고, 하늘이 흐리다가 파래지면 '엄마, 하늘이 파래' 하고 감동하고…."

    '햇볕 쬐기'와 '내가 새라면'

    넷째 봄누리(28)도 독일 남편과 낳은 딸이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봄누리를 '햇볕 쬐기'란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봄누리에게 부디 평화로운 날이 있기를 바라면서 만든" 닥종이 작품이다.

    "엄마, 나 임신했어."

    "…."

    자랑스럽게 말하는 딸의 전화에 김영희는 전화기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없이 휘청거렸다"고 말했다. '미혼모가 됐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봄누리가 다시 임신 소식을 전해왔다. 여전히 미혼이었다. 첫째 아이의 아버지와 다시 동거하면서 아이를 가진 것이다. "엉터리 프랑스 남자가 아이에게 또 왔어요." 김영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얼굴이 예쁘고, 예의가 바르고, 공부도 늘 일등을 했어요.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상을 받아 독일 신문에도 났어요. 그럼 뭐 합니까. 다 소용없어요. 그런 여자가 오히려 남자를 못 견뎌요." 그는 "엄마 된 죄로 별꼴을 다 본다"고 말했다.

    김영희는 책에 이렇게 썼다. "성(性) 개방이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높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성 개방은 그저 제약(피임약)회사를 거부(巨富)로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어떻게 딸을 키우지? 어지러웠다."

    하지만 첫 번째 임신 전화를 받은 김영희는 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축하해. 너도 이제 어머니라는 큰 명예를 얻었네." 그렇게 말하고 그는 펑펑 울어버렸다.

    독일에서 태어나고도 안정된 삶을 찾지 못하는 봄누리와 프란츠 두 아이를 위해 이번에 새로 만든 작품이 '내가 새라면'. 노랑부리 새에 올라 두 팔을 뻗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닥종이로 만들었다. 전시회 포스터에도 이 작품을 올렸다.

    김영희 닥종이 전시회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김영희의 닥종이 인형은 언제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머니, 아버지, 자식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가족 관람객이 많이 찾는다. 1994년 9월 3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김영희 닥종이 전시회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 조선일보 DB
    '장수의 호박', 그리고 행복한 인형들

    '장수의 호박'은 김영희 전시회의 단골 닥종이 작품이다. 셋째 장수(35)를 형상화했다. '장수와 호박' '장수의 가을' '장수의 여름' 등 장수를 소재로 한 작품은 빠지지 않고 그의 전시회에 등장한다.

    부채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생후 6개월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외롭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도 적지 않은 방황을 한 모양이다. 디자이너 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스님이 되겠다"며 집을 나서려고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자연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김치 맛 모르는 독일 사람들은 평생 김치 생각도 안 하고, 그게 뭔지도 모르고 살잖아. 나는 아버지 모르고 살아서 아버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 물론 그리움도 없고."

    한국식으로 성장한 첫째 유진(42)과 둘째 윤수(41)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유진은 독일에서 법정관리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고, 열네 살에 최연소 특별 장학생으로 음악대학에 합격한 윤수는 음악 사업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 둘 다 평탄한 가정도 꾸렸다. 두 아이를 형상화한 인형엔, 그래서 그늘이 없다. 김영희는 큰딸 유진을 '마술 하는 아이' 인형으로 만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독일에 간 아이가 언어 장벽을 넘어 변호사가 된 것이 마술 같다"는 것이다. 음악으로 돈을 버는 둘째 윤수는 '지휘자' 인형 작품으로 변신했다.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들이 원하는 일엔 돈을 아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독일 부모는 이해 못할 일이었다.

    "아이를 왜 다섯이나 낳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면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질문을 예상했는지 얼른 이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노년의 사랑은 좀 다르지만, 하하하."

    '자화상'

    김영희가 독일 남편과 결별한 것은 1996년. 법적으로 이혼이 성립한 것은 1999년이었다. 서울 개봉동 아파트를 판 돈을 들고 전시회 통역으로 온 아르바이트 독일 대학생 애인을 따라 무작정 떠난 것은 1981년. 이미 미술계에 이름이 알려진 김영희는 한국 언론을 "유학을 간다"는 말로 속이고 사라졌다.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사회보장수당밖에 받을 수 없는 처지였어요. 남편은 대학 2학년. 객기에 불과했지요. 벌판에 발가벗고 혼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김영희는 이번 전시회에서 '자화상' 인형을 여럿 선보인다. 그중 하나가 발가벗은 젊은 여자가 큰 냄비를 인 모습이다. 냄비 위엔 희망을 뜻하는 푸른 싹이 나온다. 초기의 경제적 궁핍은 휴양지 슈타른베르크의 갤러리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작품당 1500마르크(당시 독일 간호사 월급이 1300마르크)짜리 출품작의 3분의 1이 팔려나간 것이다. 이렇게 작품을 팔아 착착 모은 돈으로 뮌헨에서 자동차로 50분 떨어진 도시 펜칭에 길이 43m짜리 커다란 집을 샀다. 하지만 이 큰 집에서 인생의 주름살은 오히려 늘었다. 남편과의 불화 탓이었다.

    이상했다. 독일어 실력이 늘면 늘수록 소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벽이 더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의 독일어를) 알아들을수록, 이해할수록 외로웠어요. 그가 왜 저런 말을 할까? 문화가 틀리기 때문이었겠죠." 처음엔 서로를 유인하는 동력이었던 나이 차이도 그를 점점 외롭게 만들었다. "난 '제3의 사나이(1949년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는 빵빵 쏘는 것이나 좋아하고, 하하."

    아내가 유명해지자 콤플렉스도 엿보였다고 했다. 독일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김영희는 점점 밝아졌지만, 그런 아내를 보는 토마스는 점점 어두워졌다. "대학 다닐 때는 정말 리버럴했는데, 사회에 나온 뒤에는 그렇게 자신이 비판하던 '독일 남자'가 됐어요."

    김영희는 독일 남자에 대해 "대개 젠틀맨"이라고 말했다. "말없고, 정확하고. 소시민적이면서도 돈 아껴서 작품을 사고. 세계에서 미술품을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이에요." 그런데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 남자들, 여자가 더 잘나선 안 돼요. 더 벌어도 안 돼요. 그런 면에서 지금 독일 총리(여성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남편이 대단하지요. 미남인데도 뒷바라지를…. 처음엔 (총리) 보디가드인 줄 알았어요. 독일에선 남자가 아내에게 돈을 딱 주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내 씀씀이를 체크해요. 한국은 고급 레스토랑엔 여자들이 앉아 있죠? 독일 고급 레스토랑엔 새카만 남자들뿐이에요. 예술품 컬렉터도 98%가 남자예요."

    닥종이 인형
    사별과 이혼을 경험했어도 다시 사랑하고 싶었을까?

    김영희가 '그 사람'을 만난 것은 결별 후 14년째 되는 해였다. 14년 동안 "눈치를 보는 홀아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십대였으니까 아직 남성의 시선이 있었지요. 난 한국에선 못난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독일 남자 눈으론 괜찮다는 거예요, 하하. 여자가 전시회를 하면 멋있어 보이긴 하거든."

    '노래하는 아이'와 '옷 만드는 아이'

    김영희는 3년 전(2010년) 친지의 소개로 '그 사람'을 만났다. 우리 나이로 예순일곱이었다. 프러포즈를 받은 기분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국어의 힘이 컸던 것 같아요. 사랑이란 의미 속에서 모국어를 들으니,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을까? 모르핀 맞은 것 같았어요, 하하. 잠을 못 잤어요.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대학 때 듣던 올드송들. '케세라세라'가 나오면 서로 '아, 좋다'고 말하고. 팻 분, 냇 킹 콜. 연애를 시작하면 술 마신 것처럼 열이 오르잖아요. 지금은 그런 단계는 지났지만."

    '동갑 예찬론'을 이어갔다. "요즘 독일에서도 철학적 농도가 있는 똑똑한 사람들은 동급(同級)을 택해요. 영화배우나 신흥 부자만 과시욕에 연하를 찾고. 내 아이들에게도 나이 차이가 큰 사람과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큰아들은 한 살 연상, 큰딸도 한 살 연상과 결혼했지요."

    결혼 계획도 세웠을까? "그 사람은 '팔십쯤 결혼할까'라고 말해요. 한 10년은 사귀고 견뎌야 사랑이 뭔지 안다고. 살아보니 동감이에요." 평균 수명이 아흔까지 늘어나는 시대이니 그럴 만했다. "10년 뒤를 계획하시니 두 분 모두 건강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라고 하자, "아니,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생, 하루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산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 새로 나온 작품이 '노래하는 아이'와 '옷 만드는 아이'다.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왜 이 작품이 내 인생의 새로운 한 조각을 반영하는지를, 하하."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19일 시작된 닥종이 인형 전시회 '김영희의 아이들'은 다음 달 25일까지 진행된다.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