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21 01:24

김용민 포스텍 총장
"단기 성과 연구에 빠지지말고 세계가 놀랄 큰 연구 도전해야…
과학·수학에 뛰어난 학생들 古典보며 인문학도 관심갖길"

포스텍(POSTECH·포항공대) 김용민(60) 총장이 "재학생들의 대기업 취업을 보장하는 산학(産學) 대여 장학금 제도를 내년부터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김 총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기업으로부터 받는 산학 장학금은 학생들에게 안정적 직장을 보장해주지만, 기업 요구에 따라 대학이 단기적 성과를 내는 연구에만 매몰되는 부작용이 있다"며 "포스텍은 앞으로 좀 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대기업 취업이 보장되는 장학금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 총장은 "대한민국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창의력과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며 "산학 장학금은 (개인이든 대학이든)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측면이 있어 이를 극복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산학 장학금 대신 다른 예산을 확충해 학생들의 장학금을 마련하겠다고 포스텍은 설명했다.

김용민 포스텍 총장은 “포스텍은 미국의 칼텍(Caltech·캘리포니아공대)을 모델로 연구 중심 대학을 추구한다”면서 “개교 27년 만에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초반부터 교수와 학생이 연구에 전념하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용민 포스텍 총장은 “포스텍은 미국의 칼텍(Caltech·캘리포니아공대)을 모델로 연구 중심 대학을 추구한다”면서 “개교 27년 만에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초반부터 교수와 학생이 연구에 전념하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스텍 제공

2011년 9월 취임한 김 총장은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학생, 교육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포스텍이 세계 최고 대학으로 자리잡으려면 최고를 지향하는 학풍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단기 성과 위주 연구가 아니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큰 연구'에 도전하자는 것이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포스텍 제2도약기'를 선언했다. "포스텍 개교 이후 25년간(1986~2011년)이 '제1도약기'였고 앞으로 25년은 '제2도약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포스텍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대학으로 성장한 이유는 개교 당시부터 해외 석학을 교수진으로 유치했고, 재단인 포스코와 국민이 전폭적 투자와 지원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포스텍이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난 25년간 우수한 교수와 연구 시설을 갖추는 학교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면, 앞으로 25년은 소프트웨어 혁명, 즉 대학 내 세계적 학풍을 만들어가는 시기"라고 했다.

―산학 장학금 폐지에 반대 여론도 많을 것 같다.

"섭섭한 교수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들이 (단기) 연구 성과만 신경 쓰면 안 된다. 학생들 교육이 우선이다. 불편한 진실은 직시하고 뛰어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학자, 창업, 글로벌 기업 취업 등 다양한 미래가 열려 있는데, 산학 장학금은 이런 가능성을 모두 닫아놓는다. 안주하면 안 된다. 중·장기적으로 산학 장학금 폐지가 학생에게도, 한국 기업에도 더 좋을 것이다."

―포스텍을 포함해 한국 선도 대학들의 국제 경쟁력을 어떻게 보나.

"단기간에 크게 성장했지만 교육과 연구의 균형을 잃었다. 연구 중심 대학이란 기치 아래 상대적으로 학생 교육을 등한시했다. 지금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잠재력 있는 학생을 지도해 학생의 꿈을 키워주고 있는지 대학이 자문해야 한다."

―포스텍에는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데.

"우리 학생들은 세계 어느 대학에 데려다 놓아도 잘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과학과 수학은 잘하는데 인문학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것 같아 아쉽다. 셰익스피어 연극도 보고 고전도 읽으며 다양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래야 더 창의적·혁신적 연구를 할 수 있다."

―포스텍은 지난 2010년 캠퍼스 내 영어 공용화를 선언했다.

"대학원 강의 90%가 영어로 진행된다. 교수와 학생들 영어 수준이 점점 높아진다. 영어 강의 확대가 적절하냐는 논란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어학 수준이 더 높아지는 5~10년 후면 그런 논란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본다."

포스텍 교직원들은 지난해 '당신은 정직한가'(낸 드마스 저)라는 도서 500권을 단체 구매했다. 교원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총장님이 대학 경영에서 워낙 윤리를 강조해서"라고 했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김 총장은 "한국 대학들이 양적으로 발전했을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특히 윤리성과 공정성, 투명성 이런 분야에서 좀 더 확실한 학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파 학자인 그에게는 아직도 학자들의 논문 표절 논란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우리 사회가 낯설어 보였을지 모른다.

그는 학내에서 '조용한 개혁가'로 통한다. 화려한 구호를 내세우기보다 내실을 강조한다. 지난해 가을 세계 대학 평가에서 포스텍이 '개교 50년 이하 대학' 중 1위를 차지했을 때다. 일부 교수가 "학교를 홍보하는 플래카드를 내걸자"고 건의했지만 김 총장은 "학교가 잘하면 되는 거지, 그걸 뭐 홍보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포스텍은 '플래카드가 없는 대학'으로 통한다. "포스텍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대학에서 찾을 수 없는 차분하고 조용한 면학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실력을 쌓는 거죠. 저는 화려하고 포장된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대학에서는 이를 자제해야죠."

[金 총장은…] 워싱턴大 학과장땐 생명공학과를 美 톱5 학과 만들어

제주 출생으로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1976년 도미(渡美)해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워싱턴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과, 방사선의학과 교수를 겸임하는 '학제 간 융합 연구'를 주도했다. 8년간 생명공학과 학과장을 맡아 이 학과를 미국 대학 학과 평가에서 톱5까지 끌어올렸다.

워싱턴대 교수로 재임하면서 지식재산권 200여개, 30여개 회사 창업, 기술이전 80여건을 이끌어내며 시애틀의 바이오메디컬 산업 발전을 주도했다.

학생들에게는 항상 "연어가 돼라"고 강조한다. 곰의 먹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과학과 연구에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새벽 5시에 직원들한테 업무 이메일을 보낼 정도로 연구와 일이 취미인 총장이라고 포스텍 교직원들은 전했다.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는 처남 매부 사이.

[포스텍은…] 新生대학 중 세계 1위, 연구·논문인용 압도적

지난 1986년 개교한 포스텍은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올해와 지난해 영국의 교육 전문지 THE(The Times Higher Educati on)가 발표한 '개교 50년 이하 신생 대학 순위'에서 포스텍은 2년 연속 세계 1위에 올랐다. 지난해 THE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전 세계 대학 중 50위였다.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는 종합대가 아닌 특성화 대학 분야에서 3년 연속 1위다.

포스텍이 세계 신생 대학 중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THE 세계대학평가는 연구·교육·논문 인용도·산업체 수입·국제화 등 5개 평가 부문으로 구성되는데 포스텍은 연구, 논문 인용도, 산업체 수입 3개 평가 부문에서 홍콩과기대 등 세계의 다른 신생 대학을 많이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포스텍의 교육과 연구 여건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5.3명(2013년 기준)이다. 교수 269명이 매년 2000건 이상 논문을 발표한다. 교수 1인당 SCI급 논문 발표량이 연간 6건 이상이다.

포스텍의 이 같은 발전에 세계 언론들이 주목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6월 '어느 대학이 다음 세대의 MIT인가?(Who's Next MIT?)' 기사를 통해 포스텍의 성과를 소개했다. 월드뱅크 리포트는 비영미권 대학 중 세계적 연구 중심 대학 11개교 중 하나로 포스텍을 꼽았다.

☞산학 장학금

대학이 기업에서 요청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연구에 참여한 학생이 졸업 후 해당 기업에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받는 장학금이다. 포스텍 대학원생 100여명은 매년 삼성·LG·SK하이닉스 등으로부터 산학장학금(총액 20억원 규모)을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