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허기증

학교가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내 달렸다. 유월이 시작되는 하늘은 햇살이 반짝였고 하굣길 옆 밭이랑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보리 이삭들이 잔바람에 일렁였다. 다른 때 같으면 느릿느릿 걸으며 보리 이삭들이 춤추는 광경에 넋을 놓던 가, 아니면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보랏빛 감자꽃에 넋을 잃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내 눈엔 그게 보이지 않는다.

빨리 가야 했다. 다른 친구들 보다 한 발 앞서 가야 했다. 감꽃이 후두두 떨어진 골목길을 지나 빨간 앵두가 익어가는 집. 늘 커다란 개가 사납게 짖어 무서웠던 그 집 앞도 오늘은 무섭지 않았다. 숨을 헉헉거리며 도착한 그 집 앞. 커다란 대문이 가로막은 그 집. 높다란 시멘트 블록 담장 안에는 아름드리 체리나무 세 그루가 주홍빛 열매를 달고 서 있었다. 계단에 서서 목이 빠져라 그 체리를 쳐다보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벌써 오십 년전 일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때 그 나무를 사꾸람보(일본명 사쿠란보)라고 불렀다. 체리는 늘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벚꽃이 필 때쯤이면 그 나무에서도 꽃이 피었다. 벚꽃 모양을 닮은 꽃들이 가지 사이사이마다 연보라빛 몽글 거리며 피어났다. 벚꽃이 꽃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날, 체리꽃들도 꽃 비가 되어 사라져 갔다. 사월이 가고 오월이 왔다. 그러면 영락없이 푸른 잎 새 사이로 버찌를 닮은 열매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고 그 열매들이 어른 손톱 크기보다 크게 자라는가 싶으면 드디어 푸른빛에서 노란빛으로, 살굿빛에서 주홍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정확히 그때 부터다. 아이들이 그 집 축대 밑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건….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우리 마을 아이들이나 건넛마을 아이들까지도 그 축대 밑을 기웃대기 시작하는 건 매한가지다. 멀쩡히 다니던 길을 놔두고 빙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건 순전히 그 사꾸람보 탓이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하나둘 떨어지는 체리를 주워 먹기 위해 눈치작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체리 하나 주워드는 날이면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그 달콤하고 새콤한 맛에 빠지곤 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나만 그 집 축대 밑을 배회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 축대 밑을 배회하다 누군가를 오는 기척이 나면 아닌 척 재빨리 뛰어 집으로 가곤 갔었다. 훗날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더니, 누구랄 것도 없이 그 축대 밑을 배회했던 얘기들을 꺼내놓아 배를 잡고 웃었다. 별다른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유일하게 사지 않고도 달콤한 맛에 빠질 수 있는 유일한 과일이었다. 아마 그때 쯤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실컷 먹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병이다. 어쩌다 한 개씩 주워 먹었으니 얼마나 감질났겠는가. 그러니 체리에 대한 허기증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기증을 채우려고 그동안 실컷 먹기도 했다. 언젠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땐 노천 시장에 갔더니 1kg에 삼천 원 하길 래 3kg이나 사서 혼자 다 먹었다. 터키에 가서도 그만한 양을 혼자 다 먹었다. 분명 실컷 먹긴 먹었을 텐데도 체리를 보면 허기가 진다. 그뿐이 아니다. 비록 비싸긴 하지만 요즘엔 국내에서도 수입되어 유월이나 칠월이면 어김없이 시장에 나오는 터라 싸건 비싸건 일단 먹을 만큼 먹는데도 늘 체리만 보면 허기가 진다. 그러니 이건 분명 불치의 병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는 체리 열매의 그 달콤하고 새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때 그 체리와 크기나 색깔은 달라도 체리는 체리다. 그러니 마트에서나 백화점에서나 만나면 일단 사고 본다. 어제도 그제도 사다 먹고 또 먹었지만, 허기증은 가시지 않는다. 그때 그 체리, 그 열매가 내가 그 당시에 주워 먹었던 주홍빛 체리가 아니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체리나무가 자라던 그 집은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 가옥이었다. 축대로 쌓아 올린 넓은 대지 위에 그 당시로는 상당히 큰 정원을 갖추고 있는 집이었다. 높다란 축대 위, 한쪽에 체리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이 체리나무는 상당히 커서 어른 둘이 팔을 둘러야 할 만큼 컸다. 그 옛날, 이 집에 살던 일본인이 고향 맛이 그리워 체리나무를 들여다 심었을 것이다. 주인의 그 정성에 감복해서 그 추운 강원도 혹한에서도 살아남아 체리 열매를 선사했을 것이다.

요즘 마트나 백화점에 나오는 체리들은 하나같이 검붉다. 어떤 것은 검붉다 못해 검은색을 띠기도 한다. 그러니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허기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어렸을 때의 사꾸람보를 실컷 먹지 않는 한 이 체리 허기증은 끝내 나와 생을 같이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