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권력의 맛

동생이 전선 감는 통을 가지고 왔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에서 만났을 때 부탁한 것이다. 전선통이 너무 무거워 엘리베이터에 겨우 실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지막 층에서 내리면 다시 한 계단을 올라야 옥상으로 나갈 수 있다. 동생과 아들이 낑낑대고 겨우 들고 올라와 옥상 텃밭 앞에 내려놓았다.

간이탁자로 삼았다. 탁자가 있으면 의자가 있어야 되는 법. 아파트 옥상에 두자고 의자를 사기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일 년여를 전선통은 의자도 됐다가 탁자도 됐다가 그렇게 홀로 살았다. 그런 어느 날, 지인이 플라스틱 의자를 준다기에 얻어 왔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와 전선통,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그런대로 어울려 갔다. 세월이 흐르니 순백의 의자도 세월의 때가 묻어 이젠 제법 보기가 좋다.

나는 가끔 커피 한 잔이나 발효음료 한 잔을 들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 이 탁자 앞에 않는다. 빛나는 햇살에 젖은 마음을 말리려고 꺼내 놓거나, 아무 생각 없이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날은 길지도 않은 머리칼을 날리며 내가 ‘타이타닉’의 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져 팔을 높이 들고 바람을 맞는다.요즘처럼 여름밤에는 곧잘 올라가 달빛 아래 든다.

아주 가끔은 별빛이 보며 세기도 하는데 운 좋은 날은 북두칠성을 만나기도 한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도 부려 본다. 그리운 사람들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때로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덧나 눈물 나는 날도 있지만 그런 추억마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의자에 않으면 상자텃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 평도 채 되지 않는 땅이지만 오로지 나만의 땅이다. 비록 그 땅이 등기권리증도 발급받지 못하는 땅이지만 분명 내 땅이다. 그 땅에 고추와 토마토가 자라고 그 밑에 수박과 참외도 자란다. 커다란 물통엔 감나무가 자라고, 포도나무가 자란다. 아직 어린나무들이라 의자에 앉아도 내 눈 아래 있다. 내 땅에 사는 내 백성들이다. 내가 왕인 셈이다.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잘도 보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높은 곳에 앉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까지 보인다.

상자텃밭 앞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면 텃밭엔 쇠비름도 보이고, 지칭개 벼룩나물도 보이고 개망초도 보인다. 이 잡풀들이 언제 내 땅에 침범했는가 싶어 민첩하게 의자에서 내려가 뽑아 내동댕이친다. 이쯤이면 내 권위는 하늘을 찌른다. '감히'라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올 지경이다. 이러니 나는 왕이다.

생각해 보면 잡초와 내가 기르는 것들은 한 끗 차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먹을 것은 상전이고 못 먹을 것은 미천한 신분으로 땅바닥을 긴다. 쇠비름이 슬쩍 들어와 눈치 보며 슬슬 발을 뻗어 영토를 확장해 가는 것도 못마땅하고, 앙증스럽기만 한 벼룩나물도 전혀 예쁘지만은 않다. 내 백성들을 위해서 그냥 물리쳐야 할 적 일 뿐이다. 겨우 두어 자 높이 앉아 있을 뿐인데 권력이 무한대로 커지는 의자로 바뀐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눈길을 준 것이 얼갈이배추가 자라는 상자텃밭이다. 무심히 바라보는데 상자 가장자리에 무언가 꼬물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뭘까' 싶어 얼른 일어나 다가가보니 작은 개미가 지나간다. 저 개미가 있으면 내 백성한테 진딧물이 달라붙어 피골이 상접하여 말라 죽을 것이다. 잴 것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가 잡고 만다. 이쯤 되면 권력의 남용이다. 못마땅한 것을 너그럽게 봐 넘기지 못하니 권력의 남용일 수밖에 없다.

목숨을 잃은 개미의 처지에서 보면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어제까지 노란 꽃을 피워 날 기쁘게 하던 괭이밥도 이쯤 되면 미워진다. 고추나무 아래서 눈치 보며 잘 보이려고 앙증맞은 꽃까지 피웠던 괭이밥도 미워져 가차 없이 뽑아 던진다. 변덕이다. 어제는 예뻤다고 했다가 오늘은 보기 싫으니 없애버리니 횡포다. 다시 의자에 앉아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바닥에 개미 몇 마리가 바삐 줄지어 간다. 비상이 걸렸나 보다. 못 본 척한다. 관용을 베푸는 것도 가진 자의 권력이다. 믹스 커피의 맛보다 훨씬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