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는 고려 시대 여인들의 삶을 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 그녀들의 죽음을 통하여 만나게 되는 묘지명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여인들의 삶에서는 기록조차 거부당하고 있으나 고려 말의 문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내인 정신택주(貞愼宅主, 1331~1394)의 묘지명으로 알아가는 고려여인들의 삶의 방법이다. 정신택주의 묘지명은 이색의 제자인 양촌 권근이 쓴 문집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 시대의 여인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묘지명에 따르면 택주 권 씨는 13331년(충혜왕 1) 명문 안동 권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 권한공은 충선왕과 충숙왕 때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수상까지 지냈으며 아버지도 재상을 지낸 집안의 2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난 당대의 권문세가이다. 1341년 11세의 나이로 명성이 자자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6~1396)과 혼인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능력 있는 사위를 얻고자 함은 부모의 다 같은 소망이지만 고려 시대가 지니고 있는 “양측 적 친속(兩側的 親屬)이라는 독특한 친족구조로서 그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조선 시대에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구조와는 다르게 고려 시대는 처가도 외가도 함께 중시되었다.
음서와 공음전시 혜택이 사위와 외손자에게도 주어졌으며, 사위나 외손자의 공으로 장인이나 외할아버지가 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풍습에 의하여 딸을 낳아도 애지중지 키워서 밤낮으로 그가 장성하기를 바랐던 것은 딸이 부모를 봉양해주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인을 남자 집에서 하고 여자 집으로 가는 조선 시대의 풍속과는 다르게 고려 시대는 혼인을 여자 집에서 하고 여자 집에서 머무르면서 성장하였다는 기록으로 진(秦)나라의 데릴사위 풍속과 같아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여자의 임무로 되어 있다.
특히 혼인 뒤 남자가 처가에 머무는 기간은 양가의 경제력이나 자녀구성, 관직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무남독녀는 평생 처가에 머물기도 하고, 외아들은 상대적으로 빨리 시댁으로 갔을 것이며, 자신이 처한 관직에 따라 지방으로 부임을 간다거나 하면 분가할 수도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혼인과 가족제도 아래에서의 여성의 삶을 살펴보면 딸도 아들과 같은 소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남녀차별이 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식을 호적에 기재할 때도 아들 먼저 쓰고 딸을 나중에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 출생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또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기도 하였다. (여주이씨 소릉공 파보에 실려 있는 낙랑군 부인 최 씨 호구 자료)
효도에 대하여도 효도의 대상이 시부모가 우선이 아니고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처부모와 외조부모의 기일에도 휴가를 주어 고려의 제사는 부계집단 위주의 수직적 형태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 윤이 이초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과 함께 청주로 유배가 되고 맏아들 역시 폄출된다. 1391년(공양왕 3)에 석방되어 한산 부원군에 봉해지나 1392년(공양왕 4, 조선 태조 1)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아들 셋 역시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후환을 없애려는 조처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살해된다.
택주는 1392년(태조 1) 남편과 함께 한산의 시골집으로 내려왔으나 이미 아들들의 죽음으로 병이 깊어지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1394년(태조 3) 10월 택주는 한산 가지원(加知原) 선영에 묻히고 남편 이색도 2년 뒤 졸하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고려 말 지배층 여성의 삶을 살았던 그녀의 묘지명으로 알아가는 ‘양측 적 친족’ 구조와 연관된 고려여인들의 삶이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숨겨진 이름을 잠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 이름을 기록하여 가는 오늘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역사가 될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이별의 이야기를 남기지만 그 이야기들이 남아서 뒤따라오는 시간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겨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