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명칭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한자명칭 :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탑 시대 : 통일신라시대 주소 :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가금면) 탑평리 11
문화재청 설명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평리 칠층석탑 전경. 높다란 단 위에 자리 잡아 더 높아 보인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탑(中央塔)
▲탑이 워낙 높고 크다보니 기단부부터 여러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지붕돌도 5층까지는 여러 개로 짜맞추었다. 몸돌도 6, 7층만 단일석재이며 나머지 층 몸돌은 모두 여러장의 판석을 세우는 방식으로 맞추었다.
"탑평리 칠층석탑?" 막상 충주에 가서 물어보면 잘 모른다. 중앙탑이 어디냐고 물어야 금방 알아듣고 알려준다. 심지어 2014. 2. 1일부로 기존의 가금면을 중앙탑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만큼 중앙탑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얘기다.
중앙탑이라 부르는 연유는 이곳이 이 나라의 중앙이라는 것이다. 옛날 통일신라 때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한날 한시에 출발한 두 사람이 이곳에서 딱 마주쳤으니 다시 해 보아도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커다란 탑을 세웠고 그랬으니 그 이름이 중앙탑이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중앙탑 주변은 수변공원으로 잘꾸며놓았으며 '중앙탑공원'이라고 부른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넓고 긴 돌로 바닥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2층의 기단을 쌓았는데 1층은 낮고 2층은 몸돌만큼 크고 높다.1층과 2층 기단의 면석에는 여러개의 기둥을 새겨넣었다. 높은 탑신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크기로 보인다. 남쪽으로 연꽃무늬 석재가 하나 놓여있는데 탑 앞에 세워졌던 석등의 하대석인듯하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높다란 단위에 올라앉아 그 크기가 더 크고 높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유일한 칠층석탑이며 높이도 14.5m로 가장 높다. 건립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8세기 후반 ~ 9세기 초로 파악되고 있으며, 10여 개의 크고 긴 돌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2층기단을 쌓아 올렸다. 탑 높이에 비하여 너비가 좁아서 가늘게 치솟은 상승감이 안정감보다 두드러지는 탑이다.
1917년 해체 복원시 6층 몸돌에서 훼손된 고서류 일부와 동경(銅鏡 : 구리거울) 2점, 목제칠합과 은제사리함이 나왔고 기단부에서는 청동함이 발견되었는데, 구리거울은 고려 때의 것으로 이때에도 보수, 복원이 있었던 듯 하다. 여러 차례 해체, 복원 등으로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많을것으로 보인다.
▲7층탑 위에는 2개의 노반이 이중으로 얹혔으며, 그 위로 복발과 앙화를 올렸는데 이중 노반은 보기 드문 형식이다. 상륜부도 제법 화려했겠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칠층석탑 주변은 옛 절터였으나 그동안 여러 차례의 큰물이 휩쓸고 지나가 변변한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만 해도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이 석탑을 등대 삼아 이정표 삼아 오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