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잘 열고 잘 닫고…

“6시간만 얘기하고 오세요.” 얼마 전 모처럼 세 자매끼리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 내게 건네는 아들의 당부였다. 말인 즉슨 6시간이지, 너무 오래 ‘수다 꽃’을 피우진 말란 뜻이렷다. 친구들을 반나절 만나고 와도 목이 잠기곤 하는 엄마가 하룻밤을 지새우고 오면 오죽할까 싶었나 보다.
 
하기야 한여름에 동해안이 코앞인 콘도로 향하면서도 수영복을 챙겨가지 않았으니 작심한 수다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운데 여기저기 갈 것 없이 시원한 콘도에서 뒹굴뒹굴 쉬며 얘기 나누는 게 최고’라는 언니의 말에 따르기로 한 거였다.
 
언니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다녀 봐도 여자는 그저 밥 안 해먹고 수다 떨면 그게 휴가’라고 했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언니나 이제 퇴직한 나나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는 동생이나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손 하나 까딱 않기로 했다.
 
직접 운전하는 대신 셔틀버스를 탔고, 콘도에서는 차 마시느라 물만 끓였을 뿐 식사는 모두 사 먹었다. 식성은 달랐어도 ‘차려준 밥은 그냥 맛있다’는 데는 일치했다. 예순 안팎까지 수고하며 살아온 아줌마들의 진짜 휴가였다. 즐겁게 먹고 얘기하고, 얘기하고 먹고…. 정말 입 운동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한 2 만리 장성쯤은 쌓지 않았을까. 남자는 하루 7,000단어가 적정 말수라지만 여자는 2 만에 달한다니 말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대부분 오른쪽 뇌가 발달해서 언어 감각이 풍부한 까닭이라고 한다.
 
우리도 셋이었으니 ‘여자 셋이 모이면 방 가운데 접시가 깨진다’느니, ‘여자 셋만 모이면 사발도 말을 한다’는 옛말이 틀릴 게 없었다. 하지만 남자들의 수다도 요즘은 결코 만만치 않다. 게다가 목소리들마저 커서 왕왕거리기에 십상이니 접시가 깨진다면 오히려 남자들 쪽에서가 아닐까. 수다에서 여자 남자를 갈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조금 과해도 괜찮아
 
그런데 나이로는 따져지는 것 또한 수다가 아닌가 싶다. 나이 들어가며 대접받으려면 꼭 필요하다는 ‘세븐 업(7 up)’에 의하면 그렇다.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7가지 up에는 ‘clean up(깨끗하게 하고)’, ‘dress up(잘 차려입고)’, ‘show up(모임에 얼굴 잘 내밀고)’, ‘cheer up(유쾌하게 살고)’, ‘pay up(지갑은 먼저 열고)’, ‘give up(포기할 건 하고)’에 더해 ‘입은 닫으라’는 ‘shut up’이 들어있는 것이다. 내 책상에 포스트잇으로 붙어있는 ‘뱃속에 밥을 적게, 맘속에 일을 적게, 입속에 말을 적게’도 늘 ‘shut up’을 환기시켜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며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남한테 대접받기 이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도록 스스로를 대접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입을 닫는 ‘shut up’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입을 여는 ‘open up’이 더 필요하지는 않을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 자매들은 물론이고 주위 친구들도 모두 갱년기의 신고식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노안이 본격화되고, 피부도 후줄근해지는 외적 변화에서부터 우울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작게, 더러는 크게 마음을 노크한다. 수다야말로 이런 갱년기 증상을 이겨내는 데 약이 된다고 한다.
 
이따금 받는 국민건강보험 블로그 ‘건강천사’ 메일에서 ‘인생 2막 갱년기를 마주하는 자세’를 열어보니 3가지 자세가 서울대병원의 도움말로 제시되고 있었다. 갱년기를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라, 규칙적으로 운동하라는 항목들도 있었지만, 수다가 갱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데 보다 더 눈길이 갔다.
 
자기에게 찾아온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또래의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중년의 우울증이 많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과해도 괜찮다는 얘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다는 생산성과 마케팅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일전의 한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다. 비행장 인근에 있는 한 공장에서 작업라인의 아줌마들에게 귀마개를 착용케 했다. 심한 소음 때문이었으나 이후 이상하게도 생산성이 떨어지더란 것이었다.
 
원인은 바로 일의 윤활유인 수다가 불가능해진 데 있었고, 귀마개를 떼고 일하게 하자 생산성도 덩달아 올라갔다고 한다. 또한, 요즘 상품의 주요 판매 전략 가운데 하나인 ‘입소문’ 마케팅이 바로 수다에서 동력을 얻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쓸데없이 말수가 많다’가 수다의 원뜻이건만 실은 결코 쓸데없는 게 아니 되고 있는 셈이다.
 

‘침묵하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수다를 정작 쓸데없게 만드는 건 다른 말이 아니다. 우선 일방통행적인 말이다. 경기도 용인의 고급 실버타운에서 사는 한 선배로부터 “어쩌다 윗집의 할머니만 만나면 하루를 다 뺏긴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말을 시작하면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끝이 없기 때문이란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이 편치 않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련만, 이곳저곳 아프다는 이야기가 몇 시간이고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를 피해 다니게 된다고 했다. 수다가 아니라 독백이 되고 마는 경우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 이래라, 저래라 자기식만 강요하거나, 누구 흉만 보거나, 자기는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과 남편에 대해서만 늘어놓을 때 수다는 쓸데없이 말수만 많은 본뜻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 같다.
 
자매들과의 이번 여행에서도 언니는 내게 “요리 좀 배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직장 때문에 제쳐 두고 살아왔지만, 앞으로 사위며 며느리를 보려면 배워야 한다.”는 요지였다. 언니로서야 해주고픈 조언이라 강조했겠으나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내겐 강요처럼 들렸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상처가 아니라 이를 표현할 수 없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다는 실컷 쏟아내어 마음이 후련해져야 쓸 데 있어질 터이다. 가르치려 들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그냥 말하고, 그냥 들어주는 것이다.
 
유명한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에는 누구도 삶이 끝나고 저 너머의 세상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행과 불행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가 나오지 않던가. 입을 잘 여는 ‘open up’과 그 후에는 잘 닫는 ‘shut up’의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명구가 일러주듯 때로는 ‘침묵하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