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폼생폼사

종로에서 동창 모임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 토요일 오후라 지하철은 붐비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카톡을 열심히 하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일어선다.아마 내릴 모양이다. 아줌마들의 특기를 십분 발휘한다. 잽싸게 엉덩이부터 들이밀고 앉았다. 서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것도 잠깐 다음 역에서 팔십도 넘었을 것 같은 노인 한 분이 탄다.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다. 이 여름에 중절모를 쓴 모습이나 윗옷을 모시 남방을 정갈하게 입은 폼하며 젊었을 때 한자리는 잘했을 깐깐한 풍모다. 빈틈이 없어 보인다, 참 곱게 늙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저 나이에도 몸 구석구석에서 긴장감이 감도는 풍모라니….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시라고 권한다.

그런데 이 건 무슨 경우인가. 냅다 소리를 지른다. ‘날 보고 앉으라고 나 아직 젊어. 이제 겨우 여든일곱 살이여. 팔팔한 청춘이라고!’ 일어나다 말고 놀라 도로 주저앉았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좀 좋으랴. 같은 류의 얘기를 하고 또 한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까지 안절부절이다. 다들 일어나라는 건지. 아니면 젊은 것들이 뭐가 다리 아프다고 앉아 가느냐고 비아냥대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한 때 유행했던 말 중에 폼생폼사라는 말이 있다. 언뜻 들으며 사자성어 같다. 그러나 이건 영어와 한자어의 합성어이다. form 生 form 死. 부연 설명 하자면 폼에 죽고 폼에 죽는다는 말이다. 누가 지어냈는지 참 머리도 좋다. 생각해 보면 어딘지 비아냥거림이 가득 들어있는 말이다. 나도 가끔은 오천 원짜리 밥 먹고 칠천 원짜리 커피 마시는 족속이다. 말하자면 form 生 form 死로 살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살진 않는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여분이 지나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게 멈추지 않는다. 앉아 있는 게 좌불안석이다. 맘이야 일어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싶지만 일어났다간 멱살을 잡으며 ‘가긴 어딜 가냐’고 할까 봐 이도 저도 못하고 앉아있다. 이젠 온 나라 사람들이 연약하다고 자긴 여든일곱이라도 이렇게 팔팔하다고 소리를 지른다. 참 기운도 좋다.

뭔가 대책이 서야 했다. 더 앉아있다간 무슨 화를 당할지 불안해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손을 번쩍 들고 얼굴 가득 미소를 가득 머금고 소리를 내지 않고 시늉만 ‘그리 갈게’ 하며 서둘러 일어나 앞쪽으로 나아간다. 등 뒤에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다행히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아무 탈이 없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지. 혼자 멋쩍게 웃는다. 혼자 쇼하고 있는 속마음을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만 같다.

form 生 form 死도 좋다. 아직 그 나이에도 form 生 form 死로 살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선 찬사를 보낸다. 건강한 척 폼을 잡는 것도 좋고 나이가 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도 좋다. 나이 들어 풀 죽지 않고, 궁상떨지 않고 활기차게 사는 것, 나도 바라는 바다. 제멋에 겨워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 건 아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