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차차'

“이것저것 공부하러 다니면 뭐해요? 그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선배의 목소리가 돌직구로 날아왔다. 한참 후배인 내게 부드러운 격려로 대하던 평소 그분의 말투가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였으니 망정이지 면전에서 그런 야단을 맞았다면 벌게지는 얼굴을 감출 도리가 없었을 게다.
 
그러나 아끼는 후배를 위한 마음에서임을 왜 모를까. 그나저나 선배에게 못했던 답은 그걸 봐야 알 수 있을 텐데 어디다 두었더라? 다름 아닌 건강검진 결과통보서다. 2년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을 받은 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 찾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찾아내 혈압 항목부터 살펴봤다. 답이 나와 있었다. 101/73. 바로 나의 최고/최저 혈압 수치였다. 이를 모르고 있다면 가장 기본적인 자기 건강을 잘 돌보지 않고 있는 거고, 그러면서 다른 지식을 쌓으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게 선배의 염려였다.
 
그나마 내 수치가 정상범위라는 120 미만/80 미만에 들어 선배로부터 더한 꾸중은 면하겠어서 이래저래 다행이었다. 차제에 숫자 옆의 mmHg가 무얼 뜻하나 알아봤다. 혈액이 혈관 벽에 가하는 힘인 혈압을 Hg, 즉 수은 기둥이 몇 mm까지 밀어 올려지느냐로써 측정하는 단위였다.
 
무심코 들먹였던 숫자에 이런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몰랐었다. 모르고 있는 게 어디 이뿐일까. 나이 들어갈수록 건강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건강에 관련해 무지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있는 건 또 얼마나 많을까. 하기야 너무 알려 해도 건강 염려증에 걸릴 수 있다고는 한다.

그래도 몸이 보내는 신호를 놓칠세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피노키오의 다리처럼 될 수도 있다. 동화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는 다리가 타들어 가도 알아채지 못한다. 나무로 만들어져서 통증이란 신호가 없는 까닭이었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피노키오는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피노키오의 다리

그러고 보면 몸의 통증이나 이상 증상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피노키오의 다리처럼 신호가 없거나, 있어도 감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건강검진인데, 내 경우 게으름이 그 걸림돌이 되기 일쑤다.
 
연초 건보로부터 짝수년도 건강검진 대상자임을 통보받았건만 지금까지 미적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번에도 미루고 미루다 결국은 연말께나 돼서야 검진기관을 찾았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지 검진이 마냥 지체되기에 다음부터는 서두르리라 마음먹었으나 공염불이 되고만 셈이다.
 
하지만 이런 게으름에 대해서도 변명거리는 있으니 우선 검진이 주는 부담감이다. 건보의 검진이야 거의 무료니까 비용 때문은 아니다. 딱히 편찮은 데는 없어도 행여 모르고 있던 신호가 잡히는 건 아닌지, 그간의 삶에 대해 시험을 치고 성적표를 받는 듯 마음이 졸여지는 것이다. 게다가 내시경 같은 검진의 스트레스는 또 어떻고. 의지까지 약하니 내일로, 또 내달로 미루기에 십상이다.
 
헌데 악마들의 회의에서 인간의 삶을 망치게 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차차’가 채택됐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나중에 차차 하면 되지”야말로 망하는 지름길이라 건만, 건강이 가장 소중하다면서도 이를 위한 검진은 ‘차차’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열심히 일한 당신 건강검진 받아라’

5년 전 미국 뉴욕의 허드슨 강으로 비행기가 추락했다. 새 두 마리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탑승객들이 모두 구조된 가운데 릭 엘리아스라는 사업가는 이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가정은 뒤로 한 채 앞만 보며 살아온 이민자였다. 공들인 와인 컬렉션이 흐트러질까 봐 주말에 친구가 놀러 와도 좋은 걸로 따지 못하고 창고에 모셔두기만 했다. 죽음 앞에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던 그는 결심했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더는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행복을 포기하지는 않겠노라, 다시는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않겠노라.
 
평탄한 삶에서 내가 잊고 있는 ‘살아나기만 한다면’이 지금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염원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아닌 내가 ‘살아나기만 한다면’에 처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불의지변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평탄할 때 미루지 말아야 할 게 건강검진 아닐까. 살아 있어야, 그것도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릭 엘리아스 같은 결심도 실천도 가능할 터다.
 
온라인 신문에서 눈에 띄었던 한 블로그의 제목이 떠오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를 패러디한 ‘열심히 일한 당신 건강검진 받아라’였다. 블로거는 일만 하고 살아오던 아내가 어느 날 말기 암 진단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며 건강검진을 강권하고 있었다.

‘수동적 건강’ 대 ‘능동적 건강’

그런데 몇 년 전 한 예방의학 전문의는 ‘건강검진 종합검진 함부로 받지 마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었다. 오진 가능성이 높고 불필요한 건강검진이 필요 이상의 의료행위로 이어져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요지였다. 무조건 비싸고, 검진항목이 많은 종합검진 프로그램을 선택할 게 아니라, 병력과 가계력 등을 살펴서 위험한 쪽을 좀 더 자세히 살피는 게 효과적이란 지적이었다.
 
대형 종합병원들은 물론, 최고급 호텔들까지 건강검진 클리닉에 뛰어들면서 2천만 원 가까운 프리미엄 검진 패키지마저 등장한 마당이다. 검진이 의료행위를 벗어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비즈니스가 되고 있는 현재, 새겨볼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검진을 통한 질병의 이차예방보다 일상 생활습관을 바꾸는 일차예방으로서 생활습관치료가 중요하다는 지적에는 가슴이 뜨끔해진다. 꾸준한 실천이 그 관건이지만, 건강을 위한 별 노력 없이 검진만 받기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란 것이다. 검진이 누군가 나를 점검해주고 치료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 건강’이라면, 스스로 건강을 챙기고 건강해지기 위해 일상을 바꾸는 ‘능동적 건강’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 또한 선배에게서 간혹 듣는 “오래 씹어 먹어라”, “밀가루 음식 적게 먹어라”도 잔소리가 아닌 생활습관치료의 하나로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건강한 사람이라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