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설명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이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 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신라 석탑 중 가장 장식이 많은 탑이다. 9세기 이후 화려하게 장식된 탑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탑은 장식 탑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상사(實相寺)
민족의 영산 지리산 북쪽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 천 년 고찰 실상사는 선(禪)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증각대사(洪陟證覺大師)가 당나라에 유학하며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의 선맥을 이어받고 돌아와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실상선문을 열었고, 2대조 수철 화상이 법맥을 이어서 고려까지 선종의 근본 도량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신라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사찰이라는 점이 눈에 띄며 부속암자들을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11점 등 단일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백장암(百丈庵)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백장이라는 이름은 백장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암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명칭은 백장사였다고 한다. 백장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실상사 터에 몇 칸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이라 했는데, 이후 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운월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우리가 흔히 보는 석탑의 경우 그 대부분이 상륜부가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화강암등으로 견고하게 조각되고 얹혀진 몸돌이나 지붕돌에 비하여 상륜부는 그 중심에 철심(찰주)을 박은후 아래부터 위로 여러개의 다양한 장식물을 화려하게 붙이곤 하였는데 세월속에 떨어져나가거나 망실되어 제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심지어 다 없어지고 철심만 남은 경우를 보곤 탑에도 피뢰침을 세웠다고 하는 웃지못할 경우도 있다. 또한 각 층의 지붕돌에도 귀마다 장식을 매달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처마 끝에 뚫린 구멍만 남아 있다.
그 밖에도 이곳 백장암에는 보물 제40호 석등과 제420호 청동 은입사 향로가 있다고 하는데 석등은 석탑 앞에 서 있어 살펴볼 수 있었지만, 향로는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일설에는 실상사에 있다거나, 어디 박물관에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탑 앞에는 몇 기의 조선 시대 부도군이 횡으로 늘어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