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설명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 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 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 수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 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사리장엄구의 발견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중에 석탑 1층에서 사리공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 백제 특유의 머리꽂 장식인 은제 관식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글자를 음각하고 주칠로 쓴 것으로,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금판이 발굴됨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아울러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 사리호는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됐는데,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함과 외함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 기법으로 보아 당시 백제 금속 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이 입증되었다.
한국 최초의 석탑이며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으로 최고 수준의 석조건축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1998년 구조 안전 진단을 거쳐 해체 및 발굴 조사까지 완료하였으며 2016년까지 복원할 계획으로 보수정비 중에 있다.
彌勒寺(미륵사) 창건 설화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장)이다.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이름은 薯童(서동)이었다.
新羅(신라) 眞平王(진평왕)의 공주 선화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서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쳐 주며 부르게 하였다. 이 동요가 궁중에까지 알려지자 결국 善花公主(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 한 말을 노자로 하여 귀양을 가게 된다. 이 때 서동은 선화공주를 취하여 百濟(백제)로 돌아온다.
선화가 모후가 준 황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 하자 그때야 서동은 황금이 보배임을 알게 되고, 마를 캐던 곳에 흙더미 같이 쌓여 있던 금을 師子寺(사자사) 知命法師(지명법사)의 神力(신력)을 빌어 신라 왕실에 보내게 된다. 이후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오른 후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이에 부인은 못을 메우고 여기에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므로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곳에 彌勒三會(미륵삼회)의 殿(전)·塔(탑)·廊 (낭무)를 세곳에 두고 미륵사라 하였는데 진평왕도 百工(백공)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三國遺事(삼국유사)」武王條(무왕조) 편)
彌勒寺(미륵사) 터
현재 미륵사 터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세워져 미륵사와 관련된 내용들을 상세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석탑 해체 시 발견된 사리 등 관련 문화재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입장료 무료)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터에는 현재 해체 후 복원 공사 중인 서탑 외에도 1993년 복원해 놓은 동탑과 동, 서탑 앞쪽에 각각 1기씩 세워진 당간지주 2기, 중앙의 목탑 터와 금당 터 3곳, 기타 남문과 중문, 회랑, 강당, 승방 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석탑은 1층 4면마다 가운데 문이 있고 중앙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어 서로 만나는데 가운데 심주석이 전체를 받치고 있는 구조이다. 심주석 중앙에는 네모형 사리공(한 변 25cm, 깊이 27cm)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사리호 등 19종 684점의 국보급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탑을 받치고 있던 석축을 해체하던 중 두상과 몸체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석인상이 남서편에서 발견되었다.
미륵사지에는 이밖에도 석등 받침이나 금당 터, 계단과 여러 석재들이 남아 있어 찬찬이 둘러볼 것이 많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의 능으로 보이는 쌍릉이 있어 둘러보았다.
2016년 이후, 서탑이 복원 완료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가보련다. 제발 동탑처럼 생뚱맞게 지금의 기계 재단으로 돌을 잘라 붙이지말고 옛탑 그대로만 복원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