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설명
조선 초기의 사찰건축물로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극락전은 조선 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건물이며 앞면과 옆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다. 주심포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양식으로, 안정감과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극락전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기에, 건물 안에는 아미타삼존도가 후불탱화로 그려져 있다.
무위사(無爲寺)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 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다고 '무위사 사적기'에 나온다고 하는데 진평왕 39년은 원효가 태어난 해이기에 신빙성이 없다는게 정설이다. 그래서인지 무위사 홈페이지에 보면 신라가 삼국통일 후인 헌강왕 1년(875)에 도선 국사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 번째 중창이라면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 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하며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은 1983년에 해체 복원할 때 나온 명문에 따르면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첫눈에 수덕사 대웅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아주 검소해 보이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 건물이다.
마침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황토집 한 채를 보는 느낌이다. 또한 옆면은 기둥과 들보를 드러나게끔 처리하여 오히려 간결한 느낌이며 모든 재료들이 직선으로 이루어져 단정해 보인다. 그동안 소개된 국보들이 대부분 석탑, 석등이었는데 이제 비로소 국보급 불전(佛殿)이 등장하는데 그 첫 순서가 이곳이다.
무위사 벽화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보존각이 기약 없이 '공사중' 팻말을 걸고 닫혀 있어 볼 수가 없어 아쉬운대로 무위사 홈페이지를 들여다봐야 했다.
아미타삼존도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 아미타불, 오른쪽엔 지장보살, 왼쪽엔 관음보살이다. 그 삼존상 뒷벽에 걸린 벽화가 아미타삼존도인데 삼존상과 거의 같은 구도이며, 법당이 세워진 세종 때에 함께 제작되었을 것이다.
삼존상의 뒤에는 여섯 나한이 그려져 있으며 아미타불의 광배가 둥근 원형이거나 배(船) 모양이 아니라 곡식을 키질하는 키(箕) 모양인 것이 특징인데 그림에 적힌 기록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 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고 한다.
수월관음도
아미타 삼존도가 그려진 후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졌다. 아미타삼존도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둥근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하는 남성성이 느껴진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머지 극락보전 내부 벽면을 채웠던 벽화들은 벽째로 뜯어내어 보존각으로 옮겼다는데 보존각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후불벽화 전설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 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 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 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불화를 그리거나 단청을 하는 데 있어 비슷한 전설들이 절집마다 많이 있다. 아마 신비주의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거나 영험함으로 믿음의 정도를 높이고자 함이리라.
아쉽기는 오래 전 무위사는 이름 그대로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에 걸맞게 절집 앞마당 사천왕문까지 아무 꾸밈도 장식도 건물도 없이 조촐한 사찰이었는데, 이번에 가 봤더니 커다란 주차장 구획 정리와 함께 권세 있는 집 솟을대문처럼 높다란 일주문을 세우고 절집까지 축대와 도로, 계단과 화단을 제법 잘 조성하여 번듯한 대찰이 되었으니 그동안 많은 시주와 불사의 결과인 듯하다.
그러나 월출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조붓한 사찰이었던 옛 무위사는 온데간데 없고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하고도 잘 꾸며진 절집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무위사(無爲寺)가 아니라 유위사(有爲寺)가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