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김치

유혹적이다. 입에 넣으면 금방이라도 아삭아삭 소리 날 것만 같다. 통통한 하얀 허벅지 하며 붉은 머리채가 육감적이고 도발적이다. 입안에서 군침이 사르르 돈다. 그런 나를 배추김치는 도마에 얌전히 누워 ‘어디 마음대로 해봐’ 하고 유혹 중이다. 어찌 보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하라면 못 할 것 같아’ 칼을 대고 쓱쓱 썰기 시작한다. 채 다 썰지도 못하고 유혹에 넘어간다. 김치 한 잎을 집어 입에 넣는다. 탁 쏘며 아삭아삭하는 식감이 일품이다. ‘그래 바로 이맛이야’ 입안에서 탁 쏘는 그 맛. 새큼하고 아삭아삭하고 깔끔한 맛. 한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중독되어 있는 맛이다.

일주일 전에 배추김치를 담았다. 사실 계획에는 없던 일이다. 그냥 심고 기르는 게 좋아 아파트 옥상에 작은 상자텃밭을 만들었었다. 그 상자텃밭에 우연히 들른 시골 장에서 배추 모종을 열한 포기를 사다 심었다. 물론 덤으로 무 여섯 포기도 심었다. 그들이 크는 재미로 몇 달을 잘 살았다. 그들이 다 크고 나면 이웃들에게 배추 한 포기씩 안겨 줄 생각이었다.

헉! 아침에 일어나니 뉴스에 기온이 영하로 기온이 떨어졌다고 호들갑이다. 나도 덩달아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겨우 11월이고 아직 중순도 접어들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일인지. 코트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출근을 했다.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곱던 단풍들이 세찬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창 넘어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퇴근 때도 춥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컵 바닥에 깔린 커피를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맛있게 마시며 돌아서는 순간, 그제야 떠오른 생각. 아파트 옥상의 배추는…. 아차! 싶었다. 이제야 아파트 옥상의 배추 무가 떠올랐다. ‘설마 이까짓 추위에 얼기야 하겠어.’ 그러나 마음이 조금은 불안하다. 저녁에 들르기로 한 마트를 내일로 미루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서둘러 아파트 옥상에 올라서니 바람이 세다. '뭐 별일이야 있으려고…' 중얼대며 무를 들여다보니 괜찮다. 일단 무만 뽑아 내려 왔다. 내려오는 길로 다듬어 무청을 자르는 순간, 얼었다. 무 위쪽이 마알갛다. ‘그럼 배추는?’ 한달음에 옥상에 올라 배추까지 뽑았다. 뽑은 김에 절여서 김치까지 담갔다. 그리고 오늘 김치통을 열었더니 김치는 아주 맛깔스럽게 익어 있는 것이다. 배추 여사의 변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 알다시피 김치는 익어야 제맛을 낸다. 물론 겉절이도 있고, 일부러 덜 익힌 김치가 좋아 먹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김치의 매력은 발효와 숙성을 거쳐야 제맛이 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겨울 김치를 땅속에 묻었다. 그 깊은 땅속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친 김치를 먹어 본 사람들은 누구나 반하고 만다.

그 반한 김치 맛을 내기 위해 빠르게 변하는 세월에 맞추어 김치냉장고라는 현대적인 기기가 등장했다. 너도나도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주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버튼 두세 개로 내 입맛에 맞는 김치를 사시사철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치를 꺼내며 상상의 날개는 가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그 상상의 끝에는 '사람냉장고' 하나 있다. 엉뚱한가. 나도 안다. 그러나 사실 인류의 발전을 상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사람냉장고 하나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사람냉장고가 나오면 그 냉장고에다 아름다운 추억이나 행복한 추억을 집어넣어 '보관' 단추 눌러주고, 사람이 모자라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면 '발효' 단추 눌러 주어 숙성시켜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