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설명
은해사는 통일 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 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 말, 조선 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은해사(銀海寺)와 거조암(居祖庵)
경상북도 달구벌 북방의 거산(巨山) 팔공산(八公山) 대구, 칠곡, 군위, 영천, 경산 등을 아우르는 큰 산이지만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그 산이 품고 있는 신성(神聖) 숭배가 지대함은 물론 줄기줄기 굽이굽이 마루마다 부처님을 모신 영산(靈山)인데, 그중 동쪽 방향 영천 쪽에 있는 은해사는 일제강점기 조선팔도 31본산 중 하나이자 경상북도 5대 본산이었으며, 지금은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산하에 말사 39개소와 부속암자 8개소가 있는데 국보 14호 '영산전'이 있는 거조암도 은해사의 산내암자이다.
거조암은 은해사와는 약 10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본래 거조사로 불리던 큰 사찰이었으며,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이곳에 머물면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은 역사 깊은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거조사로 실려 있는데 아마도 은해사가 사세를 크게 키우고 주변 암자들을 산하 암자로 품게 되자 거조사도 은해사의 산내암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거조암은 오백나한상을 모신 영험함을 앞세워 나름대로 사세(寺勢)를 확장하는 듯 보이며, 절 앞에는 거조암이 아니라 거조사(居祖寺)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있다.
영산전(靈山殿)
영산루 아래 계단을 통해 거조암 마당에 올라서니 국보 14호 영산전이 정면에 길게 보이고 좌, 우로는 종무소와 요사채 건물 2동이 있을 뿐, 단출한 구조였다. 그러나 수십 수백의 당우(堂宇)가 있으면 무얼하랴? 영산전 한 채면 족한 것을….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을 처음 본 순간, 전혀 낯설지 않다. 익숙하다. 사진을 익히 보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해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등이 줄줄이 떠오른다.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긴 건물인데 흙벽 그대로인 채 단청을 하지 않고 있어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이며, 영산전 아래를 받치는 높지 않게 쌓은 기단은 적당한 크기의 자연석을 오밀조밀하게 모아 붙여 직선으로 쌓은 인조석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단정한 맞배지붕이 좌우로 건물보다 충분히 나와 있어 넉넉하고 안정되어 보이며 정면중앙에만 출입문을 냈을뿐, 정면 4칸과 측면 중앙에 아래위로 2개씩의 살창이 지극히 단순하게 자리 잡아 더욱 편해 보이는 건물이다.
해체 수리 때 나온 묵서(墨書)에 의해 고려 우왕 원년(1375)에 건립된 고려 말기 건물임이 확인되었고 국보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출입문 정면에는 주존의 자리에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그 뒤에는 붉은빛 위주로 채색된 후불탱화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후불탱화인 영산탱(靈山幀)인데 유난히 붉은 채색 위주인 점이 그렇다. 석가여래 주위로 모두 좌우 5명씩 10명이 보이는데 이들은 사대제자와 사대보살, 그리고 양천왕(天王)이며, 화기(畵記)에 건륭 50년, 즉 정조9년이라고 씌어 있는 홍탱화(紅幀畵)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며 특히나 붉은 색조위주로 그린 비범한 기품이 깃든 것이라면서 문화재에 등재되어야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다.
오백나한상
거조암은 영산전이 국보라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나 신도들에게는 오백나한상으로 더 유명한 절이다. 모두 526개라는 나한들은 돌을 깎아서 만든 후 색을 칠하고 옷이나 표정 등을 입혔는데 하나같이 다른 표정과 다른 자세, 다른 의복 등을 표현하여 둘러보는 동안 웃음이 절로 나며 친숙하게 느껴진다.
영산전 넓은 내부를 좌우로 나누어 ㄷ자 형태의 단을 겹으로 둘러놓은 후에 5백 개가 넘은 나한들을 작은 보료위에 정성껏 모신 후에 각 나한마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놓았다. 바닥에 화살표를 그려놓아 그 방향으로 따라가면 중복 없이 모두를 배알할 수 있다. 도대체 이 오백나한은 누가 구상하여 누가 만들고 누가 칠했으며 누가 이렇게 조밀조밀 배열하였는지?
한단 낮은 곳에는 나한마다 접시 하나씩을 놓아 돈과 사탕이나 음식 등을 공양하며 기도하도록 하였는데 100원 동전 하나씩만 놓아도 5만 원이 넘고, 사탕 하나씩만 놓아도 큰 봉지 몇 개를 뜯어야 한다. 거조암은 이 오백나한상에게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소문, 즉 기도발이 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또한 은해사의 또 다른 산내 암자인 백흥암도 거조암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유명세를 타는 곳이며, 특히나 백흥암의 극락전 불단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절집 중 가장 아름다운 불단으로 극락전이 보물 제790호인데 비하여 내부 불단은 별도로 보물 제486호라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흥암은 아무 때나 가볼 수가 없다. 일 년에 단 한번 초파일에만 개방한다니 내년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