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썩을 건 썩어야지

식탁 위에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다. 옥수수와 감과 사과나 포도 그리고 배가 사이좋게 바구니 속에 옹기종기 모여서 산다. 인테리어용 과일 바구니다. 다들 이 땅에서 나는 친숙한 과일이다. 그중에 하나 눈에 띄는 이방인이라면 오렌지다.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오렌지가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믿고 있다.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사는지 오래됐다.

과일 바구니에 들어간 오렌지는 진짜다. 추석 무렵에 사왔으니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어쩌다 식탁에서 구르기에 무심코 과일 바구니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썩지도 않고 빛깔도 그때 그 빛깔이다. 윤기도 자르르 흐르고 지금도 향긋한 오렌지 향기가 풍기는 듯하다. 자손이 먼저 죽는 참척(慘慽)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절대로 죽지 않겠다는 오기마저 느껴져 섬뜩하다.

재작년인가 보았던 뉴스가 생각난다. 14년 지난 햄버거가 온라인상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는 뉴스였다. 미국 유타주에 거주하는 데이비드 위플은 1999년 동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구매했다. 하지만 위플은 이 햄버거를 코트에 넣어둔 채 잊어버렸다 한다. 위플이 코트 속 햄버거를 발견한 것은 2년 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햄버거는 썩지 않고 원래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호기심이 생긴 위플은 햄버거를 계속 보관했고 그대로 14년이 흘렀다. 영수증까지 위플은 해당 방송에서 ‘일부러 이렇게 오래 보관할 생각은 아니었다’며 ‘14년 동안 햄버거의 피클만 사라졌을 뿐 변하지 않아 놀랐다’고 말했다.

우리는 수시로 방부제를 먹고 마시고 얼굴에 바른다.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신다. 내 몸에도 저 햄버거나 오렌지가 꿈꾸는 영생을 나도 모르게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랬다가 먼 훗날 내게 치매가 찾아왔을 때, 이승의 기억이 다 지워지고 나면 방부제 덩어리인 내 몸만 남아 살아갈까? 생각이 꼬리를 무니 끔찍하다.

썩어야 하는 것들은 썩어야 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 언제 사다 놓았는지 잊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 속의 감자처럼 흐물흐물 썩어야 한다. 그것을 만졌던 손에서 역한 냄새가 한동안 떠나지 못해 머리까지 아파도 썩을 건 썩어야 한다. 스스로 무너져 내려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젠가 이집트에 갔다가 미라를 본 적이 있다. 향신료를 섞은 천연탄산나트륨에 몸을 담그고 아마포를 둘둘 말고 영생을 꿈꾸며 관속에 누워있는 3,200살의 파라오.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는 그 파라오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 것은 내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내가 너무 빨리 썩어질까 두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덧없이 쓰러져 허물어지고 끝내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을까 무섭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와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라지만 몸 어디에선가는 끊임없이 에스오에스를 치고 있을 것이다.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들을 제발 내보내 달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과일칼을 들고 와 윤기 자르르 흐르는 오렌지를 잘라본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조금은 말라 있다. 손으로 만져보지만 그 어디서고 썩어질 기미가 없다. 이 오렌지도 3,200살을 살고 있는 파라오를 꿈꾸는 것인가. 이 지구 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영생(永生)을 꿈꾸고 산다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은 다음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