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 교리적인 교종 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전파되어 새로운 사상으로 유행처럼 번져나간 선종(禪宗). 구산선문으로 자리 잡아 전해져온 이야기의 세 번째는 희양산문 봉암사이다. 그런데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의 봉암사는 우리가 가고 다고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지적인 위치도 교통이 불편한 곳이지만 그보다는 지금도 참선과 수도에 정진하는 수행도량으로 지정되어 그 일대가 성역화 되었으며 연중(초파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은 물론 재가불자의 출입도 금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방방곡곡 산속이나 대처 가까이에 위치한 절집들을 다니면서 입장료가 있거나 없거나 할 뿐 사찰 내에서 어느 지역에 한하여 출입을 제한하는 경우는 보았지만 아예 못 들어간다는 절은 처음이다. 일 년 내 산문을 걸어 잠그고 속세의 발걸음을 거절하는 절집이라면 왠지 더 궁금한 법. 구산선문의 희양산문 봉암사가 그 대표적이니 학수고대 가볼 날만 기다리다가 부처님오신 날에 가본 이야기이다.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그런데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초파일만 기다렸다가 몰려드니 이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린이날 대공원 앞 못지않은 교통체증과 넘치는 인파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예 전날 근처에 와서 일박하고 새벽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래도 봉암사는 절집 문고리만 만져도 성불하고 소원을 이룬다는 소문에 감지덕지 다녀왔지만 그 덕에 차분한 답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평시 폐쇄된 영역 탓인지 방문객을 위한 안내판이나 표지, 설명판 등은 태부족하여 곱절로 어려운 답사였다. 그래도 365일 중 하루, 유일하게 허락한다니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온 희양산 봉암사 이야기이다.
평상시 출입이 통제되고 초파일 하루만 열리다 보니 다행인지(?)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알고 보면 이곳 봉암사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중 하나가 있는 곳으로 매우 다양한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답사꾼들에게 수행도량의 무게는 잘 전해오지 않으나 그 안에 담겨진 문화재와 그들이 안고 있는 역사와 문화,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고 소중한 법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절집으로 들어서니 첫 관문이 일주문이다.
조금 더 오붓한 분위기를 즐기며 걸어 올라가니 절집으로 건너가는 시멘트 다리가 나온다. 속세를 벗어 불국(佛國)으로 들어서는 피안교인지? 일주문 앞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선후야 아무려면 어떠랴 성큼 건넌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물줄기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대 마애보살좌상으로 직접 갈 수 있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충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는데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훑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여있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 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 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과 주지 동춘 스님 후임 원행, 법연 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 등의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봉암사는 오래되긴 하였으나 수차례 불타고 피폐해져 온전하게 전해지는 건물은 극락전뿐이며, 중앙의 대웅보전은 1992년에 중창불사로 새로 지은 건물이고 오래전에는 금색전 자리가 금당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일체의 개방 없이 산문을 닫아걸고 수행에 정진한다는 절집이라면 응당(?) 고색창연할 줄 알았는데 이곳도 역시 최근의 중창불사에 힘입어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아 내심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대웅보전 오른쪽 뒷편으로는 정사각형 2층건물처럼 보이는 극락전이 있다. 네모 지붕은 사모지붕이라고 하며 그 위로는 탑의 상륜부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절병이라고 한다. 정면과 측면 모두 세 칸이나 가운데 한 칸만 방을 들였기에 그야말로 단칸방 전각이다. 17세기에 불타서 다시 지으면서 두겹지붕을 지닌 1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래도 봉암사에서는 가장 오랜 건물이다.
봉암사에는 국보 하나, 보물 5개가 있는데 가장 먼저 지증대사 탑(보물 제137호)과 탑비(국보 제315호)를 찾았다. 지증대사 탑은 부도를 말하며 봉암사의 유래와 지증대사 일대기를 새긴 탑비와 함께 한 세트로 보호각을 지어 관리중이다.
지증대사(知證大師) (824~882년) 이름은 도헌(道憲), 자는 지선(智詵), 속성은 김 씨로 경주사람이며 심충거사의 희사로 이곳에 절을 지은 창건주이다.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879년에 봉암사를 창건하였으며 3년 뒤인 882년 12월 18일, 저녁 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로 열반하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대사의 열반 이틀후 현계산에 임시빈소를 차리고, 이듬해 봉암사에서 다비 후 부도를 세웠다. 3년 뒤, 헌강왕은 대사에게 시호를 지증(智證), 부도 명칭은 적조(寂照)라고 내려주었으며,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최치원은 무려 8년 후에야(그때는 헌강왕이 죽고, 진성여왕 6년인 892년) 일대기를 작성하였고, 33년이 지난 924년에 부도비가 세워졌다.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芬黃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분황사 석혜강 서병각자 세팔십삼), 즉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쓰고 새겼다고 씌여져 있으며, 비문 정식명칭은 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이다. 조선시대 비문 첫머리가 有明(유명)으로 시작하는것에 대비하여 有唐(유당)으로 시작함이 눈에 띈다. 고운 최치원은 지증대사가 열반에 듦에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오호 성회상천 월락대해)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라고 표현하여 비석에 새겼다고 한다.
봉암사 경내에서 볼 수 있는 지증대사 탑과 탑비 (적조탑, 적조비), 금색전 앞 삼층석탑, 대웅전과 앞마당의 노주석 2개, 그리고 극락전까지 둘러보았다. 이제 나머지 볼 것들은 절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물론 절집을 둘러싼 완고한 담장은 없었지만 아무 곳에도 안내 간판 하나 없어서 탐방객들이 찾아다니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은 절집 좌측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볼 수 있는 마애보살좌상과 절집 오른쪽 능선을 따라 보물찾기처럼 감춰져(?)있는 승탑과 탑비들이다.
일 년에 겨우 하루, 초파일에만 개방을 한다는 것은 평상시에는 외부인이 찾지 않는다는 뜻이어서인지 봉암사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상세한 시설 배치도나 방향과 거리, 위치 등을 알려주는 표지판, 그리고 각종 문화재에 대한 설명판들이었다. 아쉬운 점이다.
백운대(白雲臺) 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마애보살좌상은 범종각 옆으로 선원을 지나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 만날수 있었다. 애초 일주문을 지나 올라올 때에 용추동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숲길로 올라가도 만날 수 있다.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커다란 너럭바위에는 수백 명이 모여 앉아도 될 만큼 충분히 넓었고 그 왼쪽 편에 보살님이 오붓하게 앉아 계셨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장관이었다.
마애불좌상은 바위의 넓은 면을 조금 파내어 감실 효과를 냈으며, 두광 효과도 함께 조성하였다. 백호에 유리알은 나중에 별도로 박은 듯하며 코 부분 역시 따로 성형을 한 듯하다. 양손에 연꽃 가지를 쥐고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으며 옷고름을 맨 모습이 뚜렷하다. 육계나 나발, 백호 등 여러가지 특징을 볼 때 석가여래로 보인다.
공양간을 지나 해우소 옆에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다지 높지않은 계단을 올라서면 동암(東庵) 현판이 걸린 건물 한동이 보이고 그 옆으로 바닥을 잘 정리한 장소에 오래된 승탑과 최근 새로이 세운 깨끗한 승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여기서부터 승탑과 탑비 여러 개를 찾아야 하는데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이 골짝 저 산 등을 오르내리며 많이 힘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세한 안내판 하나쯤 있어야 할 것이다.
함허당 탑비는 바닥과 주변이 잘 정리되어 찾기가 쉬웠으나 바로 그 옆에 있는 환적당 승탑은 주변정리 없이 자연스런 풀밭에 있어서 무심코 지나가면 못 보고 지나치기 쉬웠다. 환적당 승탑은 함허당 승탑과 비슷한 모양이다. 왼쪽의 종형부도는 잘 모르겠다.
문제는 봉암사를 중창하였다는 정진대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찾는 일이다. 아무 곳에도 안내나 설명이 없어서 우리는 산능선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숲길을 따라 이리저리 다녀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서암종정 탑비가 있는 오른쪽으로 다시 가서 더 바깥쪽으로 나가 보기로 하였다. 다행이 숲속에 길이 보여 따라갔다. 골짜기로 내려섰다가 능선으로 올라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윗쪽으로 하여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 저 윗쪽 나무숲 사이로 멋진 탑비 하나가 보인다. 정진대사의 부도 원오탑(圓悟塔)이었다. 결국 찾았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 영화처럼….
불교에 문외한이라서인지 수행도량이라해서 일 년 내 방문객을 막는 일이 꼭 좋아보이지만 않는다. 막상 방문해 보면 그다지 신비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잘 정비된 절집만 못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듯이 절집 법을 따를 밖에…. 진지한 답사객을 허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지역 단체들이나 기관에서 문화재지킴이 활동을 전개하여 이날만이라도 문화재를 안내하고 설명해 주는 활동이 병행되었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년이라도 다시 봉암사를 찾는 사람들이 이 답사기를 참고로 하면 좋겠다. 아무튼 9산 선문 중 세 번째 희양산문 봉암사를 둘러볼 수 있어 다행이며 소중한 답사 경험으로 기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