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노인이 한밤중 잠에서 깨어 부엌에 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물컵을 탁자에 놓는데 그곳에 놓여 있던 초가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실낱같은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빛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자기 침대에 낯선 사람이 촛불을 들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이 물었다. “댁은 뉘시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죽음이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는 “이제 왔군” 하고 말했다. 죽음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그래”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노인은 “아니야, 너는 다 끝나지 않은 내 꿈이야”라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이방인의 손에 있는 촛불을 단숨에 불어 껐다. 그러자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빈 침대에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노인은 그 후로 20년을 더 살았다.
얼마 전 읽은 터키의 세계적인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가운데 나오는 시리아의 동화다. 소설에서 에니시테는 유년기의 마지막 시절에 들었던 이 동화를 죽기 직전 떠올린다. 두 권으로 이뤄진 길고도 흥미로운 이야기 중에서 유독 이 대목이 가슴에 남았다. 아니, 가슴이 철렁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그저 몸과 맘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 여겨오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꿈이 없는 노인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며, 꿈을 갖고 이루려 할 때라야 삶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각성됐기 때문이다.
기뻐서 가슴이 뛰는 일
지인들로부터 간간이 들어왔던 그들의 꿈이 그 얼굴들과 함께 떠올랐다. 자기가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 시집을 출간하겠다. 퇴직 후 귀촌하겠다. 다문화가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하겠다. 이탈리아를 배우고 그 나라에서 한 계절을 살다오겠다. 그런데 내 꿈은 무엇이지? 꿈을 갖고 있기나 했던가? 건강하게, 즐겁게 사는 것? 가능한 여행을 자주 가고 책도 많이 읽는 것? 머리가 희끗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꿈을 물어봤더니 그냥 웃고 말거나, 대부분 답이 나와 비슷했다. 그런 걸 꿈이랄 수 있을까?
‘꿈PD’로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채인영 박사에 의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꿈이라고 한다. 꿈은 이뤄질지 아닐지 불확실하더라도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목표점이며, 만약 확실히 도달할 것이라면 더 이상 꿈이라 불리지 않는다. 이뤄지기만 한다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은 일,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느낌을 주는 일, 기뻐서 가슴이 뛰는 일, 내가 살아있는 이유라고 느껴지는 일, 그것을 이룬 사람을 보면 무척 부럽고 때론 질투까지 느껴지는 일이 꿈이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겐 꿈이 없는 셈이다. 도달할 수 있을 것만 바라고 있으며, 확실치 않은 것은 ‘가능한’이란 토를 달고 있으니 말이다. 30여 년 전, 사회 초년생일 때만 해도 꿈이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직장과 가정 사이 헉헉대던 세월이 꿈결처럼 지났구나 싶을 뿐, 진정 꿈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퇴직 후 다시 꿈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자신을 몰아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하루하루 감사하게 살아가면 그만이지, 꿈은 청춘들이나 꾸라고 밀쳐뒀는데 먼 나라 동화 한 대목에 가슴이 철렁해질 줄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시하지 마세요. 무조건 시작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하세요.” 꿈PD가 한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에게 한 말이다. 누구나 한 시간만 골똘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게 된다면서, 그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은 계산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꿈의 세계는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닌데 계산하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거예요. 계산하다 보니 이래서 안 될 거 같고 저래서 안 될 것 같은 거죠. 그러다 보니 꿈이 없다고 얘기하게 되는 겁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어디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사실 계산에 있어서는 젊은이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강한 게 나이 든 이들 아닌가. 나부터가 ‘가능한’에다 ‘누울 데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까지 보태 계산에 선수인데 꿈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 리 없다. 행여 자식들의 꿈마저 꺾게 만드는 기성세대이면 어쩌나 두렵기도 하다. 이럴 때 꿈PD는 ‘비 좋아 하하’를 말한다. ‘비록 지금 나는 무엇이 부족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고 또 했더니 하늘이 도와 꿈이 이뤄지더라’는 법칙이란다. ‘∼하기 때문에’가 아닌, ‘비록 ∼하지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노년에 가장 큰 ‘때문에’로 작용하는 나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내 나이가 어때서’란 트로트가 유행하고 있지만, 이미 10년 전 황안나 씨는 바로 이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초등 교사를 하며 남편의 사업 실패에 따른 빚을 갚느라 어렵게 살아오던 그녀였다. 남편의 일이 어느 정도 풀리자 65세의 나이에 해남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23일에 걸쳐 홀로 도보여행을 시도했고, 그러면서 돌아본 인생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수년 전 순전히 제목에 끌려 그 책을 펼쳐본 후 그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나이도 많지만 ‘때문에’가 아닌 ‘비록’으로 꿈을 꾸고 이루며 사는 분인 까닭이다. 그간 황 씨는 4200km의 국내 해안선을 혼자 일주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데 이어 세계 최고령의 킬리만자로 등정까지 꿈꾸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하나둘 늘고 있는 요즘이다. 이제 나도 가능성만 계산할 게 아니라 우선 생각해봐야겠다. 이뤄지기만 한다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은 일,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느낌을 주는 일, 기뻐서 가슴이 뛰는 일, 살아있는 이유라고 느껴지는 일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