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준비한지 얼마나 되었냐구요? 한 사개월쯤 되었습니다.”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이던 그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흔히들 귀농하기 전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간의 준비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 준비기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고, 마음의 강단이 서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귀농 준비기간이 길어지는 데에는 저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에게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시간이 있었다. 귀농을 하는 목적부터 그의 삶에 모든 가치가 흔들리는 그런 순간, 그런 그가 귀농을 결심하고 내려가기로 마음먹기까지 불과 4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기업 중견 사원, 평범한 농부를 꿈꾸다
나름 안정된 삶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중견 사원이었고, 서울에서 4식구 먹고살기에도 넉넉한 연봉이었다. 인생이란 고속도로 위를 신나게 달리던 그는 작년 12월 회사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그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귀농을 희망하기까지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한 가족처럼 지내는 동료들과 끊임없이 승진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 획일화된 군대식 업무환경에 경진 씨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업무강도도 높았어요. 일이 많을 땐 회사에서 잠을 자며 일을 했죠. 예전에는 이런 대한민국 시스템에 맞춰 성장하고 생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했죠. 다만 제 아이들만큼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아이들에게 그런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주기위한 일이라며 나름 위안하며 살았어요. 저와 제 아이들을 위해 지금 내가 힘들게 사는 것이라고….”
경진 씨는 귀농을 생각하기 전까지 그렇게 굳게 믿었다고 했다. 그런데 일이 많아지고 점점 아이들을 돌봐줄 시간이 없어지면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 성장에 부모의 손길이 가장 좋다는 나름의 철학으로 두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던 부부였기에, 그 고민의 깊이도 만만치 않았다.
현재 자신이 사는 삶이 더 이상 자신과 아이들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40대 초반이란 젊은 나이에 60대 중년 간부들과 함께 명예퇴직 했다.
행복한 삶이 어디 있을까
그가 처음 명예퇴직을 신청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아니 왜? 대체 왜?” 라고 물었단다. 이런저런 퇴식사유는 다양했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귀농 하고 싶어서!”
40대 초반에 막 들어선 젊은 가장이 귀농을 한다고 하니, “명예퇴직을 신청했을 때 모두가 말렸죠. 한창 일할 나이에 무슨 생각으로 그만 두냐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는데, 어떻게 밥벌어먹고 살 생각이냐며…. 귀농을 할거라 하니 모두 웃더라고요. 그런 건 은퇴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 거라고 했어요.”
주변의 수많은 만류에도 경진 씨가 귀농 결심을 바꾸지 않은 것은 경쟁력 있는 삶, 돋보여야만 행복한 삶이 아닌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경진 씨는 그게 농사라고 생각했다. 몸으로 땀 흘려 일하고, 노력하는 만큼 스스로 일구어 가는 삶이라면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닌,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거라 믿었다고 한다.
귀농 준비도, 정착지도 LTE급
경진 씨의 귀농준비는 빨랐다. 마음을 먹는 것부터 실천에 옮기기 까지 한 달. 그 모든 것을 생각하고 실현에 옮기는 데 불과 한 달이란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귀농하기로 마음먹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역으로 내려가는 일이었다. 어디에 정착할지도 정해야 하고, 주택도 구해야 하고, 한 집안의 가장이자 어린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그는 가족들과 안착할 지역을 찾기 위해 안 가 본 곳 없이 전라북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지역에 내려가기만 수십 번. 그의 마음에 진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새도 너무 예쁘고, 마을에서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고 한적하니 딱이다 싶었죠. 게다가 귀농을 준비하며 나름의 멘토라 생각했던 분도 진안에 계셨어요. 진안에 내려가 그분과 친환경 농법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결정했죠. 그래 진안으로 오는거야 라고…."
그의 결정에 경진 씨의 아내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꾸려갈 주방과 아이들이 놀 공간만 제대로 되어있다면 어디든 그를 믿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경진 씨의 전용 자가용은 진안행을 멈추지 않았다.
“막상 집을 구하려 보니 만만치가 않았어요. 농가주택이 나왔다 하면 열일 제처 두고 내려갔는데 막상 가보면 거의 다 쓰러져 가는 것도 있고 아내랑 잔뜩 기대에 부풀어 내려갔다가 그렇게 실망하고 돌아오는 일도 몇 번. 하도 실망하는 일이 많다보니 어느 순간 전원주택으로 눈이 돌아가더라고요. 그래서 전원주택 분양까지 신청했었어요. 그때 떨어졌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때 분양받았으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남들은 귀농을 생각하고 정착지를 정하는 데만 해도 1년이 넘게 걸린다던데, 빨랐던 만큼 남들보다 한 발자국 더 움직였어요.”
너 왜 귀농 하려고 하니?
귀농을 하겠다 결심하고 퇴직한 지 딱 한 달 만에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진안으로 내려가겠다고 정한 뒤 귀농을 준비하기 위해 한창 상담을 받으러 다니는 시기였어요. 성공한 귀농인 강연이라고 해서 들으러 갔는데 자기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어떻게 일해서 연 소득이 1억이 넘는다는 그런 내용이었죠. 강의를 듣는 순간 농사라는게 저런건가? 저런게 농사고 앞으로 내가 귀농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삶이라면 난 귀농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경진 씨는 처음으로 자신이 생각한 농촌에서의 삶이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주변의 사람들의 만류에도 흔들리지 않던 귀농에 대한 경진 씨의 소신이 그의 철학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갈피를 못 잡겠더군요. 방황하는 제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어요. 너 왜 귀농하려고 해? 내가 왜 귀농하려고 했었지? 나는 왜 귀농을 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묻기를 수천 번, 끝내 답을 찾지도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아내에게 주변 동료에게 귀농한다 말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 한동안 잠조차 잘 수 없는 시간을 보냈죠.”
그는 방황하는 3개월 동안, 자기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상담도 받고 귀농관련 책도 읽고 강의를 들으러 이곳저곳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방황하기를 여러 날, ‘농사행복’이란 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귀농하는 사람들을 크게 3부류로 나눠 놓은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해 정의 하자면 딱딱하고 재미없게 논문처럼 쓰여진 그런 책입니다. 그런데 방황하는 저를 잡아준 책이기도 하죠. 이 책을 읽고 제 자신에게 물었어요. 내가 귀농 한다면 나는 어떤 부류일까? 그때 생각이 났어요. 내가 왜 귀농을 하려 했는지….”
진안에서 순창으로, 다시 초보농사꾼으로
3개월 동안 방황하며 그는 깨달은 것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준비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도와줘도 그 도움을 받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진안으로 내려가겠다고 마음먹은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방황하고 있을 때, 감사하게도 진안에 계신 분들이 그를 도와주겠다고 수없이 손을 내밀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귀농하는지 조차 몰라 해매다 보니 그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귀농 하겠다 마음먹은 지금, 그는 진안이 아닌 순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 제가 진안으로 가겠다 마음먹었을 땐 저와 아내가 우선이었어요. 우리 둘 마음에 드는 지역이면 그뿐이라 생각했죠. 제 두 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그래서 진안에서도 더 오지로, 산으로, 찾아들어 간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제 두 아들에게 친구를 뺏는 일이 되더라고요. 그걸 지금에야 알았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시골에서도 아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가볼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순창읍은 두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도 평평했고, 여러모로 경진 씨의 가족을 감싸 안아 주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순창읍에 네 식구가 살 작은 집을 마련했다. 한 달 뒤에는 그도 어엿한 순창 시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역에 내려가 지금 당장은 농사를 짓지 못하니 귀촌인이라 부른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농사를 포기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는 자신이 땀 흘려 고생한 만큼 딱 그만큼의 소박한 농사, 자기가 지은 먹거리를 자기 아이들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농사, 자기와 자기 가족에게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안겨줄 그런 농사를 지을 것이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