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사과나무를 심으며…

옥상 텃밭에 있는 커다란 화분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알프스 소녀의 붉은 볼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알프스 오토메’ 사과나무이다. 품종 이름을 보자면 멀리 알프스 언덕 어디 쯤에서 건너왔을 듯 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 ‘알프스 오토메(알프스 소녀)’ 사과나무의 고향은 일본이다. 일본에서 후지와 홍옥이 결합한 신품종으로 개량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개량하자고 하여 개량된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보니 후지와 홍옥이 있는 사과밭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것이라 한다. 크기도 골프공보다 조금 큰 작고 앙증맞은 사과로 영양 면에서도 큰 사과보다 월등하다고 한다.

꿈을 꾼다

이 사과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면 어떤 색일까 무척 궁금하다. 흰색일 수도 있고 분홍색일 수도 있다. 어떤 꽃이던 간에 긴 겨울을 이겨내고 따뜻한 어느 봄날. 사과꽃이 피면 꽃향기에 취해 벌 나비보다 내가 먼저 봄길을 나설 것이다. 팔월의 땡볕아래 푸른 열매를 보고 탄성을 지르고, 가을의 따가운 햇살에 작고 앙증맞은 사과는 빨갛게 익으면 내 마음속 까지 빨갛게 익어 갈 것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내가 유년 시절에 참 많이 도 들어 본 말이다. 새삼 누가 그런 말을 하였는지 궁금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가 남긴 말로 전해지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구글에서는 ‘Spinoza’와 ‘apple’을 입력하고 검색해도 이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표현도 없다. 대신 16세기 독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발언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루터가 이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그가 실제로 이 발언을 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사과만큼 많이 등장하는 과일도 없다. 사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과 그림 등에 많이 등장 했다. 특히 그 중에서 서양문화에서 훨씬 더 많이 등장하고 또 그만큼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는 과일이었다. 선악과의 사과(원죄와 도덕)가 있고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파리스의 사과(불화와 패망)가 있다. 빌헬름 텔의 사과(정의와 용기)가 있고 뉴턴의 사과(사유와 이성)까지 우리는 흔히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꾼 4개의 사과라고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과는 커다란 힘을 발휘하여 인류의 역사를 써 가고 있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시를 일컫는 애칭이 사과다. 모두가 다 아는 애플사의 컴퓨터에는 사과 모양의 상표가 달려 전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자식을 ‘사과’라고 표현한다. 수많은 상징들과 의미가 과육, 씨, 껍질로 이루어진 이 작은 사과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사과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사과 속에서 무슨 이치를 발견하고 세계의 역사를 바꿀 물꼬를 트는 거창함 따위는 없다. 내가 사과나무를 심은 이유는 먹기보다는 꽃 피는 것을 보고자 함이 더 크다. 긴 겨울을 견딘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봄바람 부는 날 하르르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싶다.

손가락으로 햇살을 튕기면 쨍한 소리라도 날 것만 같은 어느 가을 날 오후. 푸른 하늘 아래서 무르익은 빨간 사과를 따고 싶기 때문이다. 사과 하나를 입에 통째로 넣고 아삭아삭 소리 내어 먹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