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한 글자

서울 가는 기회도 별로 없지만, 서울에 가게 되면 의레 대형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한다. 찬찬히 한 코너 한 코너 돌아보는데, 확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바로 ‘한 글자’(카피라이터 정철 저)였다. 책 제목이 특이하여 손에 잡아들었다. 평상시 좋은 문장·낱말을 모으고, 간략한 표현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터라, 무슨 내용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책 표지에 다음의 두 문장은 책 내용을 보지 않아도 짐작을 가능케 하였다.

“소중한 것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
“길게 말하지 마세요. ’한 글자’ 면 충분합니다.”

잔뜩, 호기심을 갖고 아무데나 책을 열었다. <방> ‘큰방인 것은 곁에 작은방이 있기 때문이다.’ 어!? ‘방’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이야기 아닌가? 한 군데를 더 보았다. <밤> ‘위로의 시간, 용서의 시간, 치료의 시간’ 이제사, 제대로 한 글자 낱말에 대한 설명이 된 것 같다.

명사 뿐 만 아니라, 동사, 형용사, 접속사 등 한 글자에 대하여도 흥미로운 설명을 달아 놓았다. <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과가 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생각난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뭐가 있지?’ ‘그야, 사람, 나무, 그래 자연이 모두 있지’ ‘이 바보야, 과가 있잖아?’ ‘262가지 한 글자로 인생을 읽다.’ 라고 한 뒷 표지의 글을 본 후, 책을 샀다.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책을 읽으며 왔다. 글을 읽을수록 ‘한 글자’면 충분한 것을 길게 말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수집해 놓은 낱말 자료가 생각났다. ‘한 획, 한 글자’ 때문에 뜻이 달라지는 것들을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다. 한 글자, ‘님’과 ‘남’은 점획 하나로 인하여, 관계가 정반대로 되지 않는가? 서로 못 살고 죽는 ‘님’ 사이라도, 사소한 잘못, 점획 하나로, ‘남’ 이 되지 않는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조심하여야 하는 교훈을 주는 글자 풀이이다.

또 낱말의 선후 자리가 바뀜으로 인한 정반대의 변화도 있다. 바로 ‘살자’는 것과 ‘자살’은 글자 한 자, 자리를 바꿈으로 해서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서는 게 아닌가?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우연히도 ‘자살’을 거꾸로 읽을 수 있다면,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자살’을 쓰고 또 쓰다가(자살자살자살), 거기서 ‘살자’라는 낱말을 발견하게 된다면, 불현듯 삶의 욕구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어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책을 펴 본다. <B> 가 눈에 들어온다. ‘떨어져 있으면 'D' 가 둘인데, 붙여서 ‘B'가 됐다. 알파벳 순서에서, 두 칸 앞으로 가게 된다. 또 <B>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13’이란 숫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막내가 초등학교에서 혈액형 검사를 하고 돌아와 한 이야기가 생각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빠, 나 학교에서 피검사했는데, <사다리 13> 이래.’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써 보랬더니, <AB>를 쓰는 게 아닌가?

또 책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글자를 <나> 라고 했다. 유아독존(唯我獨尊)하려는 게 아니라, <나>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는 게 아닌가? 해방 후,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첫 페이지에는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가 제일 먼저 나왔다. 그 후 개정된 교과서에는 ‘나, 너, 우리’ 가 나왔다. 나와 너 뿐 아니라, 우리까지 강조하여, 동물세계에서 인간세계로 돌아온 바(?) 있다.  

<우리>는 ‘울(울타리)’이다. 모든 것을 감싸고, 품어준다. <나>와 <너>가 하나 되어 <울> 속에 같이 드는 것이다. <나>의 글자도 <너>와 비교해 보면 획 하나, 그것도 작은 획 하나 차이다. 서로 바라보면 <너, 나> 가 <나, 너>가 된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되, 다른 점이 있는 것을 이해하고,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상대를 존중하며, 한 울에서 공존 공영 공생을 위해 살아나가야 할 것이다.

<한 글자>에서 배운 교훈이 꽤 크다. 흐뭇한 마음으로 책에 빠지다 보니, 어느덧 청주에 닿았다. 즐겁고 유익한 독서 여행이었다.

참고도서·한글자(정철 지음/허밍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