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06 09:49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하여 643년에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사찰 이름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 신라 말에 절중(折中)이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 도량으로 삼았으니 5대 적멸보궁 외에도 구산선문의 일문인 사자산문을 이룬 범상치 않은 절집이다.

사자가 없는 우리나라에 무슨 연유로 사자산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불교의 영향으로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일설에는 원래 네 가지 재물이 있다는 뜻에서 사재산(四財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법흥사는 이렇게 자장율사에 의해 세워진 이후 신라 말 도윤 철감국사가 중국 마조 도일선사로부터 선법(禪法)을 전수했다.

사자산에 선문을 여니, 바로 사자산문인바 우리나라 선종의 효시라 할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철감국사의 제자 징효 절중국사에 이르러 더욱 사세(寺勢)가 번성하였지만 이후 여러 차례 병화(兵禍)와 대화재를 만나 전소된 후 천 년 가까이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이 중건하고 사찰 이름을 법흥사로 개칭하였으며, 1933년 현 위치로 사찰을 이전하였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이곳은 흥녕사가 맞으며, 법흥사는 이후 지어진 절집이요, 우리가 부를 때는 흥녕사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 불자나 방문객들이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법흥사로 찾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니 우리도 법흥사로 부르기로 한다. 다만 이곳이 신라 말 크게 번창했던 구산선문 중 사자선문의 대표사찰인 줄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어서 아쉽다.


적멸보궁은 비보사찰인가?

5대 적멸보궁 중 그 계보의 시작이자 태두가 되는 통도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절집들은 모두 강원도에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당시 신라의 수도는 경주이고, 이곳 강원도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이거나 신라의 영토라 해도 고구려와의 접경 지역으로 군사적, 정치적으로 불안한 지역이었을 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황룡사 구층탑을 세울 것을 진언한 자장율사가 이곳에 적멸보궁 네 곳을 자리 잡았을 때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혹자는 이를 일컬어 신라왕국의 영원무궁한 발전을 위한 비보사찰을 세운 것이라고 짐작해보기도 한다. 즉 호시탐탐 남쪽으로 확장을 노리는 고구려 세력을 방비하고 왕조의 만년영화와 백성들의 무사태평을 빌기 위한 대책으로 부처님의 불력(佛力)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방어의 요충이자 국경의 요지인 곳을 골라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나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부처님이 지켜준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불교라는 종교를 통한 민심통일과 정치적 안정을 모두 꾀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법흥사 둘러보기

술이 나오는 샘 주천(酒泉)의 전설이 있는 주천면 위에 수주면이 있는데 이를 휘감아 도는 주천강은 깊숙한 법흥계곡에서 흘러나온 법흥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강이다. 법흥계곡 깊숙한 곳에 사자산이 있고 그 아래가 법흥사인데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길어서 수주면에서도 10Km는 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계곡 안쪽으로는 주로 캠프장과 펜션들만 보일 뿐 민간 마을은 드문 편이다.

그렇게 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으로 꺾이면서 법흥사 영역인데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인지 산문인지, 얼마 전까지 없었다는 기억인데 아주 크고 우람하게 세운 건축물이 나타난다. 이제 곧 법흥사임을 알려준다. 예사 일주문 같지가 않고 나름대로 거창하고 원대한(?) 포부를 세운 듯한데 우리가 보기에는 과(過)하다 싶다. 게다가 양쪽 기둥 아래에는 왼편에 거북과 용이 섞인 영물(靈物)을, 오른쪽에는 코끼리를 세웠는데 그 의미가 잘 이해가 안 간다. 구산선문이자 적멸보궁의 이름에 걸맞은 거창한 산문을 세우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넘쳐서 아쉬운 일주문이다.

▲최근 세운 듯 보이는 거대 규모의 일주문, '사자산 법흥사'를 달았고 안쪽에는 '사자산문 흥녕선원'으로 구산선문임을 밝히고 있다.
▲최근 세운 듯 보이는 거대 규모의 일주문, '사자산 법흥사'를 달았고 안쪽에는 '사자산문 흥녕선원'으로 구산선문임을 밝히고 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주차장이 나오고 오른편으로 법흥사가 보이는데 비교적 평지에 횡으로 길게 몇 채의 당우가 보이는 매우 조촐하고 검소해 보이는 절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적멸보궁은 조금 더 뒤쪽, 위편에 있다. 어정쩡한 모습의 누각이 출입문 구실을 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니 그동안은 외려 황량한 느낌이었을 듯 하다.

▲좌우로 돌담과 축대로 경계를 쌓은 중간쯤 개방된 곳에 누문(樓門)을 세워 2층은 원음루, 아래층에는 금강문이라 하였다.
▲좌우로 돌담과 축대로 경계를 쌓은 중간쯤 개방된 곳에 누문(樓門)을 세워 2층은 원음루, 아래층에는 금강문이라 하였다.

누문을 들어서면 지형은 좌우로 길게 가로 형태인데 왼편으로 커다란 불전 하나가 아직 현판도 달지 못해 새집인 채로 서 있고 그 오른편 뒤쪽에 징효대사 승탑과 탑비가 있다. 정면으로는 작은 규모의 만다라 전이 있고 그 오른편으로 오르막길이 뒤편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누문 오른쪽은 종무소나 각종 요사채 등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여러 채 모여 있는 비교적 단순한 배치이다.

▲정면의 작은 건물은 만다라전이다. 만다라는 깨달음의 경지를 예쁜 기하학적 무늬로 그린 것인데 드물게 보는 전각이다.
▲정면의 작은 건물은 만다라전이다. 만다라는 깨달음의 경지를 예쁜 기하학적 무늬로 그린 것인데 드물게 보는 전각이다.

적멸보궁

만다라 옆,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다. 금색 글씨를 새긴 커다란 표지석이 있어 찾기 쉽다. 90년대 들어 17평 적멸보궁을 중창한 이래 법흥사 중창 불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자칫 근본이 흩어질까 걱정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상원사 적멸보궁처럼 크게 더 크게 만들어 붙이는 무대장식(?)은 보이지 않아 안심이다.

▲절집 중앙 정면의 만다라전 옆길을 따라 십여 분 올라가면 적멸보궁에 다다른다.
▲절집 중앙 정면의 만다라전 옆길을 따라 십여 분 올라가면 적멸보궁에 다다른다.

이 길을 따라 십여 분, 멀거나 높지 않은 곳에 적멸보궁이 있다. 법흥사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법당 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있으며, 통유리를 내어서 뒤편 언덕에 모신 부처님 진신사리를 향하여 경배하고 예불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법흥사 적멸보궁,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투명 창문을 낸 것이 밖에서도 보인다.
▲법흥사 적멸보궁,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투명 창문을 낸 것이 밖에서도 보인다.

적멸보궁 뒤 좌측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토굴이 있고 그 오른쪽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영월 법흥사 부도가 있다. 이 임자를 알 수 없는 사리탑에 진신사리를 모셨다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무명 스님의 사리탑이 아닐는지.

▲적멸보궁 뒤편 언덕, 토굴과 승탑이 보인다. 불교 관련 조각을 새긴 석축을 쌓았는데 예술성이 없어 보인다.
▲적멸보궁 뒤편 언덕, 토굴과 승탑이 보인다. 불교 관련 조각을 새긴 석축을 쌓았는데 예술성이 없어 보인다.
▲자장율사가 수도했다는 토굴, 내부는 가로 1m 60cm, 높이 1m 90cm 정도로 한 사람이 앉아서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인데 정진 중 주변에 가시덤불을 두르고 정진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옛 스님들께서 수행하던 토굴의 원형으로 가치가 있다.
▲자장율사가 수도했다는 토굴, 내부는 가로 1m 60cm, 높이 1m 90cm 정도로 한 사람이 앉아서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인데 정진 중 주변에 가시덤불을 두르고 정진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옛 스님들께서 수행하던 토굴의 원형으로 가치가 있다.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사리탑인데 여느 스님의 승탑과 다를 바 없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싶다.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사리탑인데 여느 스님의 승탑과 다를 바 없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싶다.

5대 적멸보궁 중 역사의 이어짐이 흩어졌던 법흥사. 흥녕사로 지어졌다가 천 년 가까이 폐사 상태로 지내오던 것을 20세기 들어서 다시 짓고, 옮겨 짓고, 새로 이름 지어 모신 절집. 그래서인지 진신사리탑이 의문이다. 절 이름도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다. 절집 규모는 아직 빈약하고 허술하기도 한데, 대규모 중창 불사가 연거푸 이뤄지는 중이다.

구산선문에서 가장 번창했었다는 사자선문이자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사자산 법흥사. 어딘지 조금 어수선하고 무언지 약간 어설픈 느낌이다. 특히 진신사리탑이라는 승탑을 마주하면 인정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상원사처럼 뒷산 어디엔가 비밀히 모셨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인 듯하다.

▲징효 대사 절중의 탑비와 승탑, 탑비 옆에는 까만 오석의 법흥사 중건비가 서있고 승탑 못미처 이름 모를 종형승탑이 보인다.
▲징효 대사 절중의 탑비와 승탑, 탑비 옆에는 까만 오석의 법흥사 중건비가 서있고 승탑 못미처 이름 모를 종형승탑이 보인다.

그밖에도 법흥사에는 구산선문을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의 제자 징효 대사 절중의 탑비(보물 제612호)와 승탑이 있다. 하지만 적멸보궁의 명성으로만 찾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구산선문을 일으킨 징효 대사 탑비와 승탑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