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적멸보궁의 마지막 이야기는 태백산 정암사이다. 앞서 답사한 통도사, 봉정암, 상원사, 법흥사는 모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직접 봉안한 곳이지만 이곳 정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그러나 정암사에서는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수마노탑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으니 조금 어리둥절하지만 굳이 따질 일도 아니기에 이를 전제로 하고 5대 적멸보궁 마지막 이야기를 열어본다.
정암사(淨岩寺)
정암사는 적멸보궁과 뗄 수 없는 자장율사가 입적한 곳이다. 당나라로 건너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를 가져온 자장율사는 이 땅의 오대산에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서울(경주)로 돌아갔으며, 이제 세상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자장율사는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의 친견을 서원하며 지내던 중, 중국의 오대산에서 범어게송을 주던 스님을 꿈에 만나니 '내일 대송정에서 만나자'하여 달려가 만나게 되었다.
그 스님은 '문수보살이 태백산 갈반지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하고 사라지니 도대체 갈반지는 어디란 말인가? 葛(갈)은 칡나무요. 盤(반)은 소반인데 그 뜻을 알 수 없어 산을 헤매다가 칡이 얽혀있는 자리에 구렁이 십여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이곳이다 싶어 절을 지으니 석남원(石南院)인 바 오늘의 정암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문수보살을 만나지 못한 자장율사
이렇게 석남원을 짓고 거기에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낡은 방포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가지고 와서 자장율사를 만나기를 청하니 시봉이 괘씸하게 여겨 쫓아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 거사는 강경하게 말이라도 전하라고 하니 시봉은 어쩔 수 없이 자장에게 상황을 설명하였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자장은 잘 타일러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시봉은 내 말이 맞지 않았느냐며 거세게 몰아내자 그 늙은 거사는 '쯧쯧,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느냐'며 칡 삼태기를 거꾸로 들자 죽은 강아지는 큰 사자보좌가 되어 푸른빛을 발하며 그 노인을 태우고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시봉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은 '나의 아상(교만한 마음)이 문수보살을 못 뵙는구나. 그동안의 수양이 허사로다' 하며 급히 법복으로 갈아입고 쫓아 나왔으나 이미 사라진 후인 것을….
'내가 석 달 뒤 돌아올 테니 나를 태우지 말라'며 바위에 앉아 입정에 들었는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백일이 되어가자 사람들은 다비를 해야 한다 아니다 기다리자는 등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때 어느 스님이 찾아와 스승이 이미 열반에 들었는데 다비를 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쳐 제자들은 자장이 입정에 든 바위에서 다비를 하니 이때 공중에서 자장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내 몸이 티끌이 되어 의탁할 곳이 없구나. 너희는 계(戒)에 의존하여 생사의 고해를 건너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 결코 해피엔딩이 아닌 스토리이다. 시쳇말로 화병에 돌아가신 건 아닌지.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문수보살 친견인데 나 자신의 교만으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아마도 남을 업신여기고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자만심을 경계하라는 평생의 교훈을 남기신 것 아닌가 싶다.
정암사 둘러보기
정암사는 태백산, 정확히는 함백산 아래 파묻히듯 깊숙이 자리 잡은 크지 않은 절집이다. 탄광도시에서 카지노 유흥도시로 변모한 사북 고한을 지나 태백을 가는 방법은 두문동재 터널로 가는 38번 국도가 주도로이며 고한에서 오른쪽 산길, 함백산 만항재를 넘는 414번 도로가 있는데 만항재 방향으로 틀어서 호젓한 산길을 가다 보면 급격한 오르막이 시작되기 전 왼쪽으로 보일 듯 말 듯하게 나타나는 그런 곳이다.
일주문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절집 마당이다. 정면에는 큼직한 포대화상이 방문객을 반기고 있고 정남향의 관음전을 중심으로 최근에 지은 듯한 몇 채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도량 전부인데 적멸보궁을 찾아온 우리에게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아니다. 절집을 감싸듯 둘러싸고 흘러내리는 계곡물에는 열목어가 산다는데 그 건너편에 우리가 찾는 적멸궁이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나지막한 울타리를 두르고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으며 간결한 조경이 아주 운치 있고 차분해 보이는 안채 같기도 하고 별채 같기도 한 곳, 그곳이 적멸궁이다. 들어서는 입구에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났다는 고목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고사목이다. 이 나무가 다시 사는 날 자장께서 이 땅에 다시 온다니 기다려볼 수 밖에….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너 나와서 적멸궁 뒤편의 야트막한 산을 오르면 그곳에 수마노탑이 있다. 수마노탑(水瑪瑙塔)이란 우리가 말하는 칠보 중 하나인 마노를 말하는데 이 탑을 마노석을 쌓았기에 이르는 말이며,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원석인데 서해 용왕이 실어다 주었기에 물 수(水)자를 써서 수마노라고 하게 된 것이다. 한자를 배우지 않았거나 모르는 사람은 수마노탑이라면 암마노탑은 어디 있냐고 묻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에 한자 병행 교육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자장이 이곳 갈반지를 찾아 절을 세우고 이어서 탑을 세울 때 세우면 쓰러지고 다시 세우면 또 쓰러지고 하여 백일기도에 들었더니 기도가 끝나는 날 눈 덮인 위로 칡 세 줄기가 뻗어 나와 하나는 지금의 수마노탑 자리에 또 하나는 적멸보궁 자리와 법당 자리에 멈추어 그 자리에 탑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속칭 갈래사라고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수마노탑 (보물 제410호)
자장이 원래는 이곳에 3개의 탑을 세웠는데 수마노탑 외에 금탑, 은탑이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속인(俗人)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함부로 할까 두려워 보이지 않게 감추었다고 하니 정암사 주변 함백산 줄기 금대봉, 은대봉 어디쯤 있는 것은 아닐까?
전탑이나 모전석탑의 경우 일반석탑과 달리 방형의 2층 기단이 아니라 단층 기단만 하거나 벽돌로 쌓곤 하는데 수마노탑의 경우 마치 지붕돌 층급받침처럼 6단의 벽돌쌓기로 기단을 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탑신을 올렸는데 1층 몸돌 아래에는 자세히 보면 2단의 받침을 고였음을 알 수 있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하였는데 막혀있어 안을 볼 수 없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 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단,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정암사를 찾아간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눈이 쌓여 고즈넉함이 더해지고 깊어져서 산사(山寺)가 무엇인지 알겠다는 느낌. 발소리도 조심스럽게 돌아보고 있는데 난데없는 스피커 음이 찢어지듯 적막을 깨뜨린다. 적멸궁에서 무슨 예불이 있는지 스님의 독경과 함께 발원 시주자의 주소성명을 장황하게 낭독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저걸 왜 크게 틀어서 천지사방으로 알려야 하는지? 게다가 앰프 성능이 안 좋은지 잡음이 원음보다 크게 들려 완전 공해 수준이었다. 조금 작게라도 하면 좋을 텐데 음량은 왜 그리 큰지? 산사의 적막함과 쓸쓸함을 느껴볼 체감의 답사를 기대했던 생각은 완전히 오산이었고 실망감이 낭패감으로 변해 결국은 화가 났다. 천 년 전 문수보살을 못 뵙고 절망한 자장율사의 교훈을 잊었는지 산사는 산사다웠으면 싶었다.
이렇게 하여 졸속이나마 5대 적멸보궁을 모두 돌아보았다. 주마간산으로 겉모습만 보았을 뿐 절집마다 지닌 내력과 큰스님들의 이야기, 설화처럼 전해지는 옛이야기가 가진 교훈과 가르침, 그리고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는 부처님의 참된 몸, 그 머무심에 대한 경외심과 심오한 진리야 알 길 없으니 답사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해보지만 어느새 반풍수 못지않은 반보살 반거사의 답사꾼들이 되어감에 이 또한 자업(自業)이라 생각하며 이만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