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에 들렀다. 시간이 나면 마트보다는 시장에 들러 물건을 사는 것이 오래된 버릇이다. 주차장에 잠시 차를 주차해 놓고 시장으로 들어섰다. 가장 급한 참기름을 한 병 샀다. 마트에서 사면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을 사야 하지만 시장에 나오면 기름집에서 막 짜서 나온 참기름을 살 수 있다. 공장 제품보다야 훨씬 고소한 맛을 내기에 여기까지 찾아와서 산다.
참기름을 사고 시장을 나오며 생각해 본다. '지금 산 참기름의 푸드 마일(Food Mile)은 얼마나 될까?' 산 참기름이 중국산이니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가까운 청도에서 왔을 것이다. 비행기로 왔다면 푸드 마일 거리는 약 1시간 40분. 그러나 참깨의 수송이 배로 왔을 거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배로 왔으면 18시간 걸린다. 거기다 산지에서 수집하고 보관하고 그러니 하루는 훌쩍 넘어가는 거리다. 여기다 무게를 곱한 것을 푸드 마일(Food Mile)이라고 한다.
푸드 마일(Food Mile)이란 각각의 먹을거리 이동거리(km)에 무게(ton)를 곱한 값을 말한다. 즉, 생산지에서 우리 집 부엌까지 먹거리 이동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먹거리 이동거리가 길어질수록 에너지를 이용하고 또 그만큼 많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지구를 더욱 뜨겁게 하게 된다. 내가 산 참기름이라는 먹거리가 한쪽 끝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이동 시간이 길어지니 농산물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화학비료나 여러 가지 화학처리를 할 것이다.
푸드 마일(Food Mile)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푸드 마일리지가 높다고 한다. 푸드 마일리지가 높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 번째로 먹을거리 속에 화학 약품이 많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 이동하는 식품은 부패를 막기 위해 다양한 방부제나 첨가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푸드 마일리지가 높을수록 인체에 유해한 약품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게 사람들에게 유익할 리는 없을 터, 그래서 생긴 말이 푸드 마일(Food Mile)의 거리가 나의 건강거리라는 것이다. 먼 곳에서 온 먹을거리들이 나의 건강의 질을 그만큼 떨어트린다는 얘기다.
언제가 우리 집 냉장고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 온 옥수수통조림이 있고, 고추장, 된장은 모두 미국산 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냉동실에 있는 새우와 냉장실에 있는 고사리, 도라지는 중국에서 왔고, 고등어는 러시아에서 왔고, 참깨는 중국에서 왔다. 그뿐 아니다. 후추는 인도네시아에서 왔고 호주에서 온 쇠고기도 있다. 우리 집 먹거리는 이미 세계화된 지 오래다. 푸드 마일리지 계산을 뽑아볼까 하다가 무서워서 그만두었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최소한의 먹거리는 내 손으로 길러 먹자. 그게 내가 아파트 옥상에서 먹거리를 기르기 시작한 이유다. 상추와 열무를 기르고 토마토를 길러 먹었다. 고추와 고구마를 길렀다. 올여름 푸성귀들은 이것저것 기르는 바람에 사 먹지 않니다.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들을 점차 신토불이인 ‘로컬 푸드’로 바꿔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요즘 트렌드가 된 로컬 푸드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로컬 푸드 운동이란 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사는 곳의 인근에서 생산된 것, 특히 자기가 사는 곳 100㎞ 이내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뜻한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는 인근의 소규모 지역 농장들을 중간 상인 없이 직접 만나 거래하는 그린마켓이 인기다. 인근에서 각자 자기가 기르고 먹고 남은 먹거리를 들고 나와 파는 곳인데 이 시장에 나온 사람들은 신선한 식품을 바로 얻을 수 있고, 지역 사람들은 자신이 기른 농산물을 판매하여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파 한두 단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으니 도시 농업이 제대로 정착된 것이다.
푸드 마일리지가 건강을 좌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금 전 세계는 텃밭 가꾸기 열풍이 불고 있다. 캐나다의 밴쿠버에도, 미국의 뉴욕에도, 영국의 런던이나 프랑스의 파리 등에서도 정부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텃밭 가꾸기를 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출발이야 늦었지만 서울 곳곳에서도 도시농업은 이미 불이 붙었다. 건물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 곳곳에 흩어져 버려진 빈 땅에 텃밭을 만들어 시민에게 나눠주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정년퇴직을 하고 텃밭 가꾸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정년 후에 무얼 할까? 하는 고민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파트 옥상의 상자 텃밭으로 가서 물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내가 화분에 심어 기른 수확한 ‘알프스 오토메’ 사과를 갈아 한 잔 마시고는 따 가지고 온 상추 겉절이를 하고 이제 막 딴 호박으로 호박 나물을 만든다. 거기에 내가 길러 담근 열무김치를 올리고 가지무침까지 곁들이면 아침 식사 한 끼로는 훌륭하다.
어쩔 수 없이 먼 고향인 러시아산 생선 한 토막이나, 호주산 불고기를 올려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최소한의 로컬 푸드를 만들어 내는 뿌듯함이 오늘 아침도 활기차게 시작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비록 아직 농사의 농(農)자도 모르는 짝퉁 도시농부지만 점차 제대로 된 농부(農夫)가 될 것이다. 그때는 좀 더 많은 로컬 푸드를 접하면서 백 세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