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 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 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 탓에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 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비견되는 아름다움
창녕 술정리 동 삼 층석탑 앞에 서면 불국사 삼층석탑, 즉 석가탑이 떠오른다. 신라 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석가탑과 높이와 크기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전체적인 느낌과 탑의 모습이 쌍둥이 탑을 대하는 것 같다.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이라는 이 층의 기단 위에 삼 층석탑 그 모습인데 어느 곳 하나 소홀한 곳이 없으며 과하게 넘치는 곳도 없다. 전체적으로는 절제된 아름다움의 표본이라 할 만큼 조각이나 장식성을 배제하였고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듯한 비례감과 균형미는 물론 말없이 서 있는 남성적인 모습의 무게감과 안정된 솟아오름은 감탄스러울 뿐이다.
불국사 석가탑은 삼 층 지붕 위에 노반이 얹혀져 있고 상륜부 장식이 세워져 있는데 (이 상륜부도 역시 없던 것을 남원 실상사 탑 상륜부를 모방해 복원한 것이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탑의 석재 부분은 거의 일치할 정도로 비슷한 외관을 보인다. 마치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불국사 전각과 회랑을 날려버리고 석가탑을 벌판으로, 아니 창녕시 동네 한가운데로 보내 놓은 것 같다.
불국사를 여러 번 드나들다 보면 처음에는 동탑인 다보탑의 복잡 화려하고 다양한 아름다움에 현혹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찾다 보면 서탑인 석가탑의 단순한 모습에 더 끌리게 된다. 보면 볼수록 멋지고 아름다움에 끌려 마음이 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답사 초보자는 다보탑이 좋다 하고 경륜이 쌓이면 석가탑이 좋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창녕 술정리 삼 층석탑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이 통일신라 석탑의 표준으로 손꼽히고, 이후 경주에서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지만, 일부에서는 술정리 탑이 오히려 100여 년 앞선다고 하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국보 석탑을 가꾼 비구니 스님
이 탑은 국보 지정 몇 년 후 수리 보수를 위하여 해체, 복원되었는데 그때 삼 층몸돌에서 사리 7과와 함께 사리병등 장엄구가 발견되어 사리는 복원 때 다시 석탑에 안치하였고 나머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누구도 이에 관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된 채 지나왔다. 삼 층석탑도 국보에 걸맞게 주변 민가들을 철거하여 보호구역을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동네 주민이 이불빨래를 널거나 시래기를 말리는 등 천덕꾸러기였으며 동네 개들의 개똥으로 지저분하고 잡풀이 자라고 쓰레기가 널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차에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석탑주변을 매일 청소하고 가꾸면서 탑돌이와 예불로 공양하니 차츰 신도들도 따르게 되고 주민도 이해와 협조를 하게 되어 지금처럼 잘 정리된 소공원 모습을 가꾸게 되었다고 한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매년 입동(양력 11월 7일)이면 동탑재를 지내면서 탑을 가꾸고 사랑하는 행사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술정리 서 삼 층석탑 (보물 제520호)
동탑과 서탑이라 하니 한자리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두 탑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500m 이상 1Km 가까이 떨어져 있다. 그런데 명확하게 어느 절에 있었는지 전해지지 않으니 그저 동탑이다 서탑이다 이름 지은듯하나 이건 어째 영 이상하다. 아무리 큰 절이라 하여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두 탑을 동탑, 서탑으로 세웠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술정리 서탑은 그런 연유로 늘 동탑과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고 그 대접도 국보 석탑에 비하여 소홀한 것인지 주변 보호구역 설정과 관리실태가 현저하게 못 해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동탑과 무관하게 자세히 살펴보면 서탑 역시 나름대로 보물 석탑으로서 자태를 갖추고 있다.
역시 이층 기단에 삼 층석탑인데 삼 층 위 꼭대기에는 노반과 복발로 보이는 석재가 얹혀 있으며, 우주와 탱주가 뚜렷하고 미끈한 동탑에 비하여 서탑의 2층 기단은 몇개의 석재를 블록처럼 맞추어 놓았는데 중앙에는 문비를 새기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서 삼 층석탑역시 동탑보다 높이가 약간 낮고 상대적으로 열세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