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황복사지(皇福寺址)
경주 어느 벌판 어느 골짝인들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없으랴마는 황룡사지와 국립경주박물관 동남쪽의 너른 들판을 보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신라 제26대 임금 진평왕릉과 함께 설총의 묘가 있으며 들판으로 내려서면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고 그 건너편에 국보 제37호 삼층석탑이 서 있는 황복사지가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낮으막한 야산인 낭산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로 이어지는데 보문들판 황복사지가 있는 곳은 지역명이 구황동,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다거나 구룡(九龍) 이야기와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진평왕릉쪽은 제법 큰 도로변이지만 황복사지라고 믿어지는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 농로를 따라 건너와서는 황복사지 이름을 본뜬 민박집으로 들어가듯이 접근해야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이곳이 황복사지라는 명확한 물증은 없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절이름 '황복'이 쓰여진 기와조각이 발견되거나 석물 몇개가 뒹그는 등 폐사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조사때 밭둑에서 십이지산상 일부가 나오는 등 흥미로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특히 1943년 석탑 해체수리때 발견된 명문에서 이 탑은 692년에 효소왕이 승하한 신문왕을 위하여 세웠으며, 그 효소왕도 승하하자 동생 성덕왕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을 다시 넣어 아버지와 형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나왔으니 탑의 기록은 확실해보인다.
신라시대 경주에 세워진 대부분의 사찰들이 왕실의 기복을 위하여 세워졌는데 이곳 황복사 역시 왕실의 원찰이었을것으로 보이지만 탑의 기록이 명확한데 비하여 황복사 관련 기록은 나오지 않아 분명치 않다. 다만 이곳 황복사에서 의상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하니 의상이 출가한 653년(19세)에도 이미 황복사는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뿐만아니라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후 귀국하여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종주가 되었으니 이곳 황복사도 못지않게 위상이 높아졌을 것으로 추측 된다.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통일신라 초기에 거대한 규모의 삼층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감은사지 삼층석탑(쌍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등이 그러하다.
거탑(巨塔)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이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불국사 석가탑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어 보인다.
즉, 이층 기단위에 삼층석탑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이지만 9m, 13m에 이르는 고선사지, 감은사지 석탑에 비하여 약7m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불안정해보이는 거대석탑에 비하여 안정되고 다부져보이는 모습은 석가탑을 떠올리게 한다.
통일신라 초기 거탑들은 기단부는 물론 몸돌도 여러개의 큼직큼직한 판석들을 짜맞추는 방식이었는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이르면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그전까지는 몸돌의 모서리 기둥(우주)을 별개의 돌로 세우고 그 사이를 판석으로 막아 몸돌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의 돌로 몸돌을 만들되 모서리에는 우주 모양을 돋움으로 조각함으로써 간단해지면서 더욱 미적 감각을 갖추게 된다. 또한 1층 몸돌에 비하여 2층과 3층 몸돌은 급격하게 줄어들어 상승감을 살렸다.
탑을 받치는 기단역시 하층기단은 모서리에 우주를 세우고 면석에는 3개의 탱주가 2개로 줄어들어 단순화 된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삼층석탑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돌의 크기가 작아지고 갯수도 줄여서 감은사 석탑의 경우 모두 82장의 돌을 짜맞추었는데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불국사 석가탑의 경우 22장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탑의 규모를 줄이면서 절제미와 안정감을 추구함은 물론 탑을 만들어 세우기가 수월해짐으로써 9세기에 이르면 탑이 무려 5배나 넘게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안에는 금제여래좌상 2구가 나왔는데 모두 국보급인지라 현재 국보 제79호, 제80호로 지정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밖에도 각종 유리구슬, 팔찌 등 많은 유물들이 함께 나왔으며 특히 사리함 뚜껑 안쪽 금판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함으로써 이 탑이 언제 누가 왜 세운 것인지 명확해져 건립의도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으니 국보급 석탑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