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앞줄 뒷줄

    입력 : 2016.08.10 09:51

    얼마 전 강남대로를 지나다가 긴 줄을 보았다. 미국 뉴욕의 명물이라고 소문난 햄버거가 한국에서 첫선을 보이는 매장 앞이었다. 문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백 미터에 달하고 있었다. 나중에 듣자하니 전날 밤부터 천여 명이 줄을 섰다고 한다. 그 근방에서 이보다 몇 주 전인가에는 한 업체의 플래그십 스토어라는 게 오픈됐다. 브랜드 이미지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제품도 판매한다는 그 가게 앞의 줄은 햄버거 경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노숙까지 불사하느라 둘러친 담요에는 이렇게 쓰인 종이가 붙어있었다. “선착순 행사 때문에 줄 선 것입니다. …제발 그만 물어봐 주시고 얼굴 좀 그만 찍어주세요.” 명동에서 브랜드 세일하는 줄을 서러 간다며, 아직 학생이었을 때 아들이 새벽부터 집을 나서던 기억이 난다. 다른 곳에 선들 이런 줄이 없을까. 당장 우리 동네 마트에서도 본다. 특정 시간에 싸게 판다든가, 하나를 더 준다든가 하는 판촉행사 앞에서다. 금세 아줌마들만의 줄이 생긴다.


    라인스탠더

    나도 지난봄 작정하고 줄을 서봤다. 모 방송국이 셰익스피어 서거 4백 주기를 맞아 셰익스피어와 클래식을 접목해 연다는 공개방송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행사에 난생처음 신청을 해봤는데, 글쎄 당첨이 됐다. 행사 시작 전에 선착순으로 표를 나눠준다고 해서 친구와 한 시간 가까이 미리 갔다. 너무 서두른 게 아닌가 싶었으나, 대기 줄은 이미 백 미터가 넘어 보였다.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우리 뒤에 선 사람은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줄은 빠르게 길어져 갔다. 그런데 일단 줄을 서고 보니 다리 아픈 건 두 번째 문제였다. ‘우리가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어서 맨 앞이 됐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해지는 것이었다. 점점 줄이 줄어들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됐을 때의 기분이란 뭐랄까. 결승점 테이프를 끊은 듯, 떠나기 직전의 버스를 간발의 차이로 올라탄 듯, 데드라인에 딱 떨어지게 원고를 마친 듯하달까. 그 기분은 이내 당연지사인 양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누구든지 줄을 서서 선착순으로 나눠주는 입장권을 받으면 셰익스피어 연극을 무료로 볼 수도 있다. 매년 여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의 퍼블릭 시어터(Public Theater)에서 열리는 공연 얘기다. 어떤 돈 많은 뉴요커들은 수백 달러를 주고 ‘라인스탠더(line stander)’를 고용해 줄을 대신 서게 한단다. 누구는 표를 구해서, 또 누구는 돈을 벌어서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것 같지만,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모든 시민에게 공평한 관람 기회를 제공한다는 행사 정신이 훼손되기 때문이란 것이다.


    뒷줄은 뒷방 늙은이?

    어디 상점이나 공연장 앞에서뿐만 인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정치 쪽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크고 작은 기업과 단체 어디에서나 줄은 생기기 마련이다. 젊은 세대에게 줄서기는 누구보다 먼저 경험하고, 공유하기 위한 일종의 놀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이 든 세대라서인지 내 경우만 해도 그게 아니다. 한 번 줄에 들어섰다 하면 마음은 그저 맨 앞으로 내달린다. 새치기나 라인스탠더인 듯싶은 이가 보이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줄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줄에서는 잠수경이라도 들이대야 할 판이다. 이 사람 또는 저 사람 앞에 섰거니, 뒤로 밀렸거니 하는 대부분 줄서기가 물밑에서 이뤄지니 말이다. 줄의 앞머리만이 아니라 누구까지 회의장 단상에 올라앉나, 청중석 앞줄에 앉나 등으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로 인해 옥신각신하고, 아예 모임에 빠지는 이도 생긴다. 공평한 기회를 갖자는 줄서기의 원뜻이 들러리냐, VIP이냐 척도로 바뀌면서 앞줄을 고집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나이 들어가며 뒷줄은 곧 뒷방 늙은이쯤으로 취급되는 거라 여기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어코 앞줄에 서기 위해 돈이나 시간을 쓰면서 동분서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수요에 따른 공급인 건지, 장 자리는 하나여도 부회장 자리는 다섯 손가락을 다 꼽아야 할 정도로 늘어나는 조직도 있다. 이사 자리는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여럿인 단체가 수두룩하다. 게다가 명목상의 갖가지 상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명예욕을 부추겨주는 건 또 어떤가. 여자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지만, 특히 남자 시니어들 가운데 자리와 상이 금방 내 차지가 될 것 같은 맨 앞줄에 연연해 하는 분들을 종종 본다.


    숨 떨어지는 순간까지…

    어느 수행자의 오래전 소회를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서 읽고 고개가 끄떡거려졌다. 평생 흐트러짐 없이 정진해온 노스님을 만나 물었다고 한다. “물욕, 식욕, 성욕 등 여러 가지 욕심 중에 성욕을 이기기가 참 어려운데, 젊었을 때 어떻게 넘기셨나요?” 무례한 질문에도 노스님은 덕담을 들려주듯 말했다. “나도 남자인데 왜 이성에 대한 생각이 없겠어. 그런데 수행 잘하면 그 정도는 다스릴 수 있어. 더 무서운 건 남이 나를 알아주는 명예욕이야. 나이가 들수록 성욕은 줄어도 명예욕은 더 지독해져. 숨 떨어지는 순간까지 떨쳐버릴 수 있을까 몰라.”

    이 줄, 저 줄을 여기저기서 보며 요즘 읽고 있는 ‘장자’의 한 대목으로 생각이 번진다.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던 장자는 초나라 왕이 보낸 신하들로부터 재상 자리를 제안받자 단칼에 거절한다. 재상 자리에 앉는 것은 죽은 지 3천 년이나 된 신령한 거북을 비단으로 싸서 사당 위에 모셔둔 것과 같다, 물 마시고 나물 먹고 베옷 입고 한가로이 노니며 사는 것은 산 거북이 진흙탕에 꼬리를 끌며 사는 것과 같다면서. 옷이 헐고, 양식은 꾸더라도 살아있는 거북이 되겠다는 것이다. 뒷줄에서도 끄트머리 같은 인생에서 앞줄로 옮겨질 기회를 마다하기가 누군들 쉬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