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6일 스물 넘긴 청년 17명이 손톱·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잘라 군(軍) 사물함에 넣었다. 이틀 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어선을 구해 엿새 걸려 인천 앞바다까지 왔다. 배가 뜨기 전까지 지휘관을 뺀 16명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작전명 '엑스레이'. 임박한 연합군 상륙 작전에 앞서 적이 점령한 인천에 침투해 정보를 모으는 임무였다. 8월 24일 새벽 1시 30분 장교 4명과 사병 6명, 군무원 7명이 인천 영흥도 십리포에 몰래 내렸다.
그 뒤 3주간 22세 지휘관 함명수 소령을 도와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24세의 김순기 중위다. 작전이 확정된 뒤 함 소령이 맨 먼저 부른 사람이 전쟁 전 인천경비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김 중위였다.
지난 10일 아흔 살 김 중위를 일본 교토에서 만났다. 관객 6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그와 연결됐다. 그는 개성 사투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행복한 세상이 오도록 선조들이 고생한 거 알아주면 좋갔어."
그는 "함 소령은 지휘자, 나는 필드 워커(field worker)였다"고 했다. 십리포에 내린 날 밤 김 중위는 인천 시내에 잠입해 전쟁 전부터 술친구로 지냈던 '인천 건달' 권상오씨와 접선했다. 북한군 보안원으로 위장(僞裝)해 부역하고 있었던 권씨가 통행증을 만들어와 대원들의 시내 잠입이 가능해졌다.
그는 "우리가 보낸 정보를 갖고 맥아더 사령부가 정확한 상륙 지점을 결정했다"고 했다. 대원 일부는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공사 현장, 방어 진지 구축 공사장에 인부로 들어가 북한군 병력과 장비를 파악했다. 다른 일부는 서울 근교와 안양·서산까지 오가며 주민들 사이에 섞여 북한군 위치와 이동 상황을 알아냈다. 그는 미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 대위와 함께 배를 타고 해안선을 염탐했다. 어느 지점에 해안포가 있는지, 부두 내벽 참호 병력이 몇 명인지, 기관총은 어디 있고 고사포는 몇 문인지 샅샅이 파악해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들은 3주 뒤 철수할 때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17명 중 2명이 전사했다.
적진에서 보낸 숨 막히는 3주간을 돌아보며 '아흔 살 김 중위'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무섭진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