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원 '품앗이 영화', 우리가 몰고 온 新바람이죠"

"엄마, 수도세가 120만원 나왔어."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아들에게서 2차 시험을 며칠 앞두고 전화가 왔다. 미장원을 운영하며 동네 여자들에게 불법 보톡스 주사도 놔주는 양미경(박지영)은 아들의 말 한마디에 당장 상경한다.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남의 일에 참견 잘하며, 동정심도 많은 '아줌마' 양미경은 아들의 고시원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4억원으로 만든 이 '범죄의 여왕'은 스릴러와 코미디, 드라마가 한 영화 안에서 충돌하며 팔딱인다. 제작 규모나 배우의 이름값이 아니라 기획 아이디어와 시나리오로 승부를 봐야 하는 저예산 영화의 전범(典範)이 될 만하다. 비슷한 사례로 꼽힐 '1999, 면회'(2012) '족구왕'(2014)을 내놓은 '광화문 시네마'의 세 번째 작품이다.

김태곤(36)·이요섭(34)·우문기(33)·권오광(33)·전고운(31) 감독과 김지훈(37)·김보희(33) PD 등 일곱 명이 함께 있는 광화문 시네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신인 감독들의 영화 제작 집단이다. 김지훈 PD 외엔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동기. 이곳의 공동 대표인 김태곤 감독은 "서로 도와주면서 각자 영화 한 편씩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모였다"고 했다.

2011년쯤 김태곤 감독이 전고운 감독에게 '1999, 면회' 초안을 이야기했고, 재미있다고 느낀 둘은 다음 날부터 촬영 장소 섭외를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쓴 김태곤 감독이 연출을, 학부 때 미술을 전공한 우문기 감독이 미술감독을, 전고운 감독이 프로듀서를 담당했다. 1000만원을 들여 완성한 '1999, 면회'는 부산영화제 비전 부문에서 상영했다. 영화제 출품 당시 제작사 이름이 필요하자 전 감독이 살고 있던 동네 이름을 따서 '광화문 시네마'라고 적어낸 게 시작이었다.

첫 영화가 호평을 받고 수익을 남기면서 이들은 서로 영화 제작을 도와주는 '품앗이'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광화문 인근 계동에 구한 작업실 임차료도 같이 나눠 낼 겸 일곱 명이 모였다. 두 번째 작품은 우문기 감독이 연출과 각색을 맡고 나머지 사람이 제작이나 연출부 지원 등을 맡았다. 1억원을 들인 '족구왕'은 투자 대비 열몇 배 수익이 났다. 예산이 늘어난 '범죄의 여왕'에서는 전문 스태프를 고용했지만, 여전히 제작총괄은 김보희 PD가, 시나리오 각색은 전고운 감독이 맡았고, 우문기 감독은 보조출연 반장을 했다. 이들은 "서로의 능력과 장기를 인정해주고 수평적 관계에서 일한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여기에서 영화를 만들 때는 제한이 없어요. 누구의 명령이나 간섭도 없고요. 그게 상업 영화를 만들 때와 다른 점이에요."(우문기)

이들이 모두 참여하는 제작 단계는 시나리오 기획이다. 이들은 "밖에서 욕을 안 먹으려면 안에서 서로 욕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언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우문기 감독은 "족구왕 시나리오만 20개 판본이 있었는데 다 재미가 없어서 '너 어떻게 할래'라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이들 간의 유일한 규칙은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것. 본인이 정한 날짜를 어기면 김태곤 감독의 '무서운 전화'를 받게 된다.

"왜 안 싸웠겠어요. 시나리오가 다 자기 자식 같은데 자식이 못났다는 얘기를 들으면 속상하잖아요. 이제는 시나리오를 위해서 그런 쓴소리를 한다는 걸 다 이해하고 있어요."(김태곤)

'광화문 시네마'의 다음 작품은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 김태곤 감독은 '굿바이 싱글'로 상업 영화에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고, 우문기·권오광 감독은 상업 영화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 김태곤 감독은 "우리의 원동력은 재미다. 서로의 아이디어가 너무 재밌어서 꼭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다. 상업 영화를 하다가 잘 안 풀릴 때 언제든 다시 돌아와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