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폭포 위로… 황석영 소설이 흘렀다

'괜찮아?'

화면 가득 꽁꽁 얼어붙은 설악산 토왕성 폭포가 펼쳐지면서 오래된 활자로 세로쓰기한 자막이 좌에서 우로 흘렀다. 순백의 빙벽을 보며 뻥 뚫린 가슴에 세 글자가 조각도로 새긴 듯 콕 박혔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건가?' 나도 모르게 되뇌는 사이 문장이 이어졌다. '밑에서 물어왔다. 바위 사이가 울려서 여운이 길게 흘렀다. 나는 그 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목소리는 어째서 내 것인 듯 느껴질까.'

영상에 흐르는 문장은 소설가 황석영의 1962년 등단작인 단편 '입석부근(立石附近)'의 일부다. 소년들이 암벽을 등반하며 겪는 자아 성찰을 담은 '입석부근'은 황석영이 고등학생이던 19세 때 지어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문학은 죽고 이미지가 활개치는 '영상 전성시대'에 영상으로 문학을 소환한 이는 작가 장민승(37)이다. 엇비슷한 영상 작품이 넘치는 예술계에서 그의 영상은 한 편의 서정시, 한 곡의 레퀴엠처럼 묵직한 빛깔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최고 권위 미술상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메스 미술상을 받아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그가 이번엔 미술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첫 번째 커미션 작가로 선정됐다. 그렇게 만든 영상 작품이 지난 21일 공개된 '입석부근'(10월 9일까지 상영)이다. 플랫폼엘은 지난 5월 서울 언주로에 만들어진 신생 미술관이지만 영상 예술 전문가인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 이끌면서 미디어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안부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해서요. 나는 잘살고 있는지, 또 너는 잘살고 있는지." 최근 만난 작가는 황석영의 입석부근과 설악산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등반하며 서로 안위를 묻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나의 안위조차 잊고 사는 현대인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해 소설(小雪)부터 대한(大寒)까지 여섯 차례, 설악산 중에서도 위험한 등반 코스로 알려진 토왕성 폭포에 올랐다. 대개 영상 작업은 몇 명의 스태프와 함께하지만 너무 위험한 작업이라 같이하겠다는 이가 없었다. 홀로 자일에 몸과 카메라를 묶은 채 영상을 찍었다. 삶과 죽음이 한 발짝 차이인 빙벽에 매달렸을 때 자일처럼 팽팽히 당겨진 삶을 살았던 아버지 세대가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꽃잎' '거짓말' 등을 만든 영화감독 장선우(64)다. 어릴 때 술심부름, 바둑돌 심부름 하면서 아버지 주변의 문화계 인사들을 자주 봤다. "한때 예술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아버지 세대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개중엔 변함없으신 분들도 있고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된 분도 계시죠." 그는 "그 시대 분들은 카메라 앞에선 다른 진영끼리 죽일 듯 싸우다가도 카메라 꺼진 뒤 냉면집 가선 '수고했어' 하고 서로 격려하던 풍류가 있었다"며 "타협의 여지 없이 으르렁대는 지금 사회를 보면 그분들의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 마음을 읽었을까. 무심한 아버지가 그의 영상 작품을 보고 말했단다. "이제 능선에 올라탔구먼."

영상엔 기성세대를 향한 존경과 비판이 묘하게 엇갈려 있다. '19세' 황석영의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그 세대가 초심을 잃은 건 아닌지 에둘러 물었다. 주인 잃은 채 암벽에 박혀 녹슨 하켄(자일을 거는 고정 장치)은 그 세대의 헌신을 상징한다.

중앙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사실 '작가'라는 타이틀로 가두기엔 끼가 넘친다. 가구 디자이너도 했고, 황신혜밴드 멤버로도 활동했다. 영화 '달콤한 인생' '주먹이 운다' 등의 음악 작업에도 참여했다. "호기심 넘치는 만큼 싫증도 빨리 낸다"는 이 전방위 예술가의 다음 도전은 '문구용품'이라고 했다. (02)6929-4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