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들의 초상… 영애씨는 10년째 근무 중

산소(山牛) 같은 여자. 몸무게 60㎏대의 다부진 직장 여성 이영애(39)씨는 오늘도 씩씩하게 서울 끝자락 방화동으로 출근한다. 외모와 상반되는 비극적인 이름. 쉽게 의기소침해지고, 돈과 사랑 앞에 매번 좌절하면서도 정의감에 불타는 이 여자가 10년째 시청자를 울리고 웃긴다. 시즌 1부터 이영애로 살고 있는 배우 김현숙은 26일 제작발표회에서 감격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오래 주도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나간다는 것 자체가 전무후무한 일 아닌가요." 오는 31일, 국내 최장수 시즌제 드라마 tvN '막돼먹은 영애씨'가 시즌 15로 돌아온다.

◇중소기업의 未生, 직장인의 초상

2007년부터 총 253회가 방영된 이 드라마는 10인 이하 영세사업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드라마는 반어(反語)로 점철돼 있다. 그녀의 전(前) 직장이었던 디자인 회사 '아름다운 사람들'의 구성원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인쇄업체 '낙원사' 역시 절대로 낙원이 아니다. 점심때 6000원짜리 순두부를 주문하면 "비싼 것만 먹는다"며 불같이 화내는 사장(조덕제)이 있고, 200만원이 될락 말락 한 월급과 멸시와 그래도 꽉 붙잡아야 하는 징글징글한 생활이 있다. 국내 기업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그러니 영애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미생(未生)인 셈이다. 시즌 1~8을 연출한 박준화 PD는 "소시민적 정서와 일상적 희로애락이 롱런의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극사실주의 묘사와 함께 이 드라마를 '다큐드라마'로 떠오르게 한 데는 내레이션의 힘이 크다. 전 시즌 내레이션을 맡은 박형욱 성우는 "목소리에 괜한 기교를 넣어 감동을 자아내려 하지 않는다"면서 "직장 여성이 여름에 겨드랑이 털을 깎고, 화장실에서 거하게 속을 비워내는 속사정만으로 호소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배우·배역이 함께 나이 먹는 드라마"

영애의 아빠(송민형), 엄마(김정하), 만년 과장(윤서현) 등 배우 대부분이 '막영애'의 역사를 함께했다. 소심한 상사(이승준), 얌체 같은 워킹맘(라미란), 궁상과 진상의 끝(정지순) 등 극 중 이름이 배우의 실명인 경우도 태반. 드라마와 현실이 잘 구분되지 않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tvN 판 전원일기'로도 불린다. 배우 김현숙이 2년 전 결혼을 발표했을 때 골수 팬들이 "배신자"라고 성토한 것도 이 동일시 효과 때문. 영애의 여동생 정다혜는 "내 만삭 때와 출산 후의 모습이 전부 드라마에 담겼다. 이건 일종의 '인생앨범'"이라고 말했다.

성희롱을 일삼는 사장에게 바퀴벌레 우려낸 녹차를 갖다주던 극 중 나이 서른의 영애는 이제 마흔을 앞두고 있다. 이직 네 번과 퇴사 두 번, 그리고 파혼까지 겪은 영애는 지난 시즌 '이영애 디자인'을 세우며 독립했다. 시청자가 더 감격한다. 시청자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저 역시 뚱뚱한 여자이고 여러 타이틀을 달고 살아갑니다. 영애가 이번에도 직장인과 딸, 여자로서 대활약해주길 기대합니다."

◇영애씨, 올해는 결혼할 수 있을까?

'이영애 디자인'은 그러나 창업 1년 만에 폐업 위기에 처한다. 월세 부담으로 '낙원사' 쪽방살이 신세가 되지만, 동시에 낙원사 전무 이승준과의 러브라인은 더 진해지게 됐다. 또 포장마차 주인 조동혁이 드라마에 새로 합류하면서 영애의 혼삿길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날 제작발표회에서 한상재 PD는 "작가들과 영애의 결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도 "결혼이 노처녀의 모든 해답인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해 결말을 숨겼다. 가족들의 의견도 갈렸다. 엄마(김정하)가 "이승준은 술주정을 너무 해서 별로"라고 말하자, 아빠(송민형)는 "철딱서니는 없어도 순박해서 좋다"고 두둔했다. 영애는 그저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