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파일 앞에 두고 아직 쪽지를 찾는 사람들

종이 | 로타어 뮐러 지음 | 박병화 옮김 | 알마 | 448쪽 | 2만2000원

1831년 독일, 한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아직 쓰지 못한 4막이 들어갈 자리는 백지로 채우라고 했지. 감각을 자극하는 대상을 보면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네." 그 작품은 '파우스트'였고 화자는 괴테였다. 당시 종이는 저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언의 명령 같은 의미였다.

이 책이 종이를 '하얀 마법'이라 부르는 것은 종이의 역사가 인류 미디어와 그 속에 담긴 정신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종이는 정보를 전달하고 보존하는 매체로서 발전했고, 지폐와 어음·주식, 정기간행물의 존재를 가능케 해 경제와 사회를 육화(肉化)했다. 고대의 파피루스, 중세의 양피지, 근세의 넝마 종이, 19세기의 나무 종이를 거쳐 이제 아날로그 종이가 전자 종이와 공존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엄청난 디지털 파일을 앞에 두고 뭔가 중요한 것을 적어둔 쪽지를 찾는다"는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