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 택한 신인 감독작… 단연 눈에 띄네

설 시즌 지나 '가족의 달' 5월 이전까지 극장가는 전통적으로 비수기다. 큰 흥행을 노린 대작이 드물어 실험적 시도나 신선한 소재·감각으로 무장한 신인 감독의 새 작품이 관객 평가를 받기 좋다. 이주영(39·작은 사진) 감독의 '싱글라이더'는 그중 단연 깔끔하고 묵직하다. 지난 22일 개봉 뒤 줄곧 박스오피스 3위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신인의 눈에 띄는 데뷔작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남자, 그간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어떤 선택을 할까. 부실 채권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증권사 지점장 '재훈'(이병헌)은 2년 전 교육을 위해 호주 시드니로 보낸 아들과 아내 '수진'(공효진)을 만나려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낯선 땅의 아내는 새 인생을 준비하는 듯하고, 남자는 방치했던 가족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돈다. 영화 전반부는 기러기 아빠, 가족 간 단절, 흙수저 청년 같은 사회문제를 다룬 듯 보이는데, 감독은 영리하게 이야기를 비틀어 뜻밖의 진실 앞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다 보고 나서 퍼즐을 다시 맞춰보는 즐거움이 있는 우리 영화는 오랜만이다. 쌍용 티볼리 등 감각적 CF 영상을 만들었던 이주영 감독은 '쉽게 휘발되는 광고 말고, 극장을 나선 뒤에도 관객의 마음에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싱글라이더'는 장편 시나리오 공모에 출품하려 썼던 작품. "시나리오가 지인을 통해 이병헌 배우에게 전달됐는데, 당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던 분이 저 만나러 한국에 온 거예요. '장르물만 계속 들어와 지쳐 있었다. 이런 작품 꼭 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배우가 먼저 나선 덕에 제작도, 투자도 붙었으니 신인 감독에겐 천운. 이병헌은 '번지점프를 하다'를 떠올리게 하는 호연을 보여준다. 감독은 "내 인생의 운을 한 방에 다 쓴 거 아닌가 걱정된다"며 웃었다.

작년 '밀정'에 이어 워너브러더스가 두 번째 만든 한국 영화. 감독은 "사회문제나 사건의 부조리를 파헤치기보다 시스템이 사건을 겪게 되는 사람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반전을 꼭꼭 숨기려 배우들이 직접 나서 '스포일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어 또 화제다.

일정과 예산이 빡빡했는데도 완성도가 높다. '구도와 미술이 지나치게 고급스럽다'는 평에 감독은 오히려 억울해했다. "예산 초과 없이 시간 맞춰 찍어내느라 멋있게 만드는 데 공들일 겨를도 없었거든요." 이 자신만만한 신인 감독, 예산과 시간이 넉넉할 때 어떤 영화를 만들어낼지 벌써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