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예술, 자연… | 가수 김세환] “노래가 좋고 자전거가 좋아요. 좋은 걸 어떡해요, 정말 좋은 걸”

    입력 : 2017.03.09 10:38

    1971년 가요계 데뷔 후 단숨에 스타로…
    1986년 미국서 MTB 들여온 ‘국내 MTB계의 선구자’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진다. ‘세시봉’의 일원으로 TV 프로그램에 나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수다를 떠는 그의 모습은 기자가 어릴 적 TV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청바지에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통기타를 치며 달콤한 목소리로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바~” 노래를 부르는 친근한 모습.

    우면산을 옆에 둔 그의 양재동 집에 다다랐을 때 그가 반갑게 문을 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1986년 즈음 TV 껌 광고에서 봤던 그때 그 아저씨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드디어 타임머신이 개발된 것인가.

    Q TV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세요. 저 어릴 때 ‘뽀뽀뽀’에서 봤던 기억이 나요. 광고에서도요.

    A “어찌 그대로겠어요. 제가 48년생으로 올해 70세예요. 저도 ‘꼰대’가 다 됐어요. 5년 전부터 지하철도 공짜로 탈 수 있어요. 참, 저번에 인터뷰하셨던 도향이 형님하고 세 살 차이예요.”

    Q 정말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비결이 뭔가요?

    A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에요. 사실 저는 대한민국에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요.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자유롭게 자랐고, 좋은 가수 형님들을 만나면서 별다른 고생하지 않고 가수로 데뷔해서 과분한 인기도 얻었죠.”

    Q 진짜 ‘꽃길’만 걸으신 거네요.

    A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왜? 어째서? 언제부터? 유명해졌을까? 그게 언제나 궁금했어요.”

    그는 1948년 원로연극인 김동원씨와 홍순지씨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 김동원씨는 집에서 한 번도 목소리를 크게 낸 적이 없을 정도로 온화했고 개방적이었다. 대학생이던 형들이 이화여대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댄스파티를 열 정도였다.

    [삶, 예술, 자연… | 가수 김세환]
    그의 얼굴엔 언제나 웃음이 가득하다. 개구쟁이 같은 입담도 아주 재밌다.
    Q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음악도 쉽게 접하셨을 것 같네요.

    A “그렇죠. 아버지께서 형들이 서울대에 입학하면 오토바이를 사준다고 했었어요. 큰형이 서울대 정치외교학과에 떡 붙었어요. 그런데 오토바이는 좀 그랬는지 색소폰을 사주셨어요. 이후 형 친구들이 자주 놀러왔어요. 서울고 밴드부장을 하던 정성조(전 KBS 악단장) 형과 김석원(전 쌍용그룹 회장) 형 등이오. 형들이 색소폰 연주곡이나 팝송을 즐겨 들어서 저도 어깨너머로 같이 듣고 색소폰도 불어봤죠.”

    Q 그래도 ‘김세환’하면 통기타잖아요. 기타는 언제 배우셨어요?

    A “고등학교(서울 보성고)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배웠어요. 대천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비가 내려서 숙소에 있는데 한 대학생이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더라고요.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의 눈이 하트로 변하데요. ‘아, 나 저거 배워야겠다’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께 기타를 사달라고 졸라서 결국 생일 선물로 받았어요.”

    홀로 책을 보며 기타 치는 재미에 푹 빠진 그는 고3이 되어서도 공부보다는 기타에 열심이었다. 보다 못한 큰형이 “공부 안 하면 기타를 부셔 버린다”고 해 재수 끝에 경희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음악에 푹 빠져 살았지만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2학년인 1969년 TBC 방송국에서 ‘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을 열었다. 이것이 ‘가수 김세환’이 탄생하게 된 첫 시작이었다. 통기타를 치며 바비 다린(Bobby Darin)의 ‘Lost Love’란 노래를 불렀다. 입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는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Q 그리고 윤형주씨를 만나시게 되었죠?

    A “네 맞아요. 1970년이었어요. 형주 형이 원래는 연세대 의대를 다니면서 송창식 형하고 ‘트윈 폴리오’란 팀으로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수 활동을 하느라 유급을 해서 경희대 의대로 왔어요. 그해 봄 신방과 신입생환영회에서 제가 노래를 불렀는데 그걸 눈 여겨 봤더라고요.”

    같은 해 여름, 김세환과 윤형주가 함께 노래하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Q 또 대천해수욕장이네요?

    A “하하 그러네요. 가족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친구들과 놀러온 형주 형을 우연히 만나 같이 어울렸어요. 그런데 저녁에 ‘트윈폴리오 윤형주입니다. 별장에 초대해도 될까요?’라고 쓴 메모지를 주더군요. ‘즉석만남’을 해오라는 거였죠.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한 무리의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뒤에서 그 여학생들과 함께 온 남학생들이 다가오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딱 맞아 죽을 뻔 했던 타이밍이었죠. 하하.”

    결국 윤형주가 직접 나서 다른 여대생 네 명에게 말을 걸어 즉석만남에 성공했다. 별장에서 한참을 놀다가 여대생 둘이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Q ‘절체절명의 위기’였네요.

    A “형주 형이 ‘내가 노래를 만들 테니 그 곡을 듣고 마음에 들면 가지 말라’고 했어요. 오선지가 없어서 제가 빈 종이에 오선지를 그려줬어요. 그렇게 30분 만에 만든 노래가 ‘라라라’예요. 지금은 ‘조개껍질 묶어’로 더 잘 알려져 있죠. 여학생들이오? 다행히 안 가더라고요.”

    이것을 계기로 둘은 붙어 다니며 함께 노래했다. 이를 눈여겨보던 DJ 故 이종환씨가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 윤형주를 불렀다. 윤형주는 김세환을 불러 함께 출연해 노래를 불렀고 순식간에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계기로 이종환씨는 둘에게 음반제작을 제의했고 1971년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3’이란 앨범이 나오게 된다. 이 앨범이 김세환의 공식 데뷔앨범이다. 라디오에서 윤형주와 함께 불렀던 ‘Don’t forget to remember’는 ‘잊지 못할 내 사랑’으로 번안해 실었고, ‘작업송’으로 만들었던 ‘라라라’도 이 앨범에 실리면서 ‘전설의 해변송’이 되었다.

    Q 이후 완전히 ‘스타’가 되셨어요.

    A “그렇죠. 빠른 시간 내에 큰 상을 많이 받았어요. 우스개소리로 ‘우리나라 가수 중에 저만큼 고생 없이 큰 가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요. 세시봉 형님들을 만나면서 덕을 많이 봤죠. 송창식 형은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어 줬고, 윤형주 형은 ‘길가에 앉아서’를 만들어 줬어요. 이장희 형은 ‘좋은 걸 어떡해’를 만들어 주었죠. 그때는 아무런 대가 없이 노래를 주고 화음도 넣어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곡 값만 얼마야, 어휴.”

    1972년에 ‘옛 친구’가 ‘대박’을 치면서 그는 그해 TBC 방송가요대상과 MBC 10대 가수상 신인상을 휩쓸었다. 1973년에는 ‘토요일 밤에’, 1974년에는 ‘사랑하는 마음’, ‘길가에 앉아서’, ‘좋은걸 어떡해’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1974~1975년 2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가수상을 수상했다. 수편의 영화와 뮤지컬에도 출연하며 김세환은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1978년 결혼한 그는 화목했던 부모님을 본받아 결혼 후 방송활동을 줄이고 가정에 충실했다.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아이들에게 가정적이고 온화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Q 2010년 즈음부터 ‘세시봉 신드롬’을 일으켰죠. 요즘 근황은 어떤가요.

    A “아…, 아시다시피 얼마 전 (조)영남이 형이 사고를 쳐서…. 지난해에는 윤형주, 이장희 형이랑 세시봉 공연을 했어요. 올해는 다른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나이 칠순이지만 아직도 그는 ‘세시봉의 영원한 막내’다. 그는 ‘개성 강한’ 형님들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중재하고 재롱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그는 “영남이 형의 배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세시봉에서는 막내지만 우리나라 아웃도어 레포츠에서 그는 거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고2 때 동대문에 있던 경찰기마대에서 승마를 배운 그는 우리나라에 스키장도 없던 1968년에 대관령에서 스키를 탔고, 1986년에 MTB(산악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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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MTB의 ‘전도사’로 불리며 30여 년 동안 자전거를 타온 그는 ‘자전거는 내 주치의’라고 말한다. / 사진 김세환 제공.
    Q ‘김세환’하면 ‘MTB 전도사’가 바로 따라 붙어요.

    A “1986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레이크타호로 스키를 타러 갔어요. 그때 MTB를 탄 사람이 슬로프를 내려오더라고요. 와, 대단했어요. ‘저거 나도 타봐야겠다’고 해서 바로 스캇(SCOTT) MTB를 샀어요. 그런데 비행기로 가져올 재간이 없어서 다 분해했어요. 부품마다 메모를 해서 붙여 놓고 조립도를 그렸어요. 목화씨를 들여오는 문익점의 심정이 이랬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가져온 그 자전거가 우리나라 MTB 1호일 거예요.”

    Q 처음에 어디에서 타셨어요?

    A “집 근처 우면산에서 탔어요. 제가 그쪽 임도를 찾아 자전거길로 많이 만들었죠. 당시엔 MTB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없어서 난감했어요. 그래서 미국 자전거 잡지를 구독하고 비디오 등을 사와서 독학했어요. 집 정리 하면서 레코드판들은 다 치웠는데 이 책들과 비디오테이프는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이후에 친구들과 1:50,000 지도를 가지고 전국을 다니면서 산에 있는 임도를 많이 찾아냈어요.”

    Q MTB의 매력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A “숲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자전거를 탄다는 거겠죠. 공기 좋은 산에 가면 맑은 공기가 입 안에서 꼭꼭 씹히는 느낌이 들어요. 유산소 운동이니까 건강에도 좋고 언제 어디서나 탈 수 있고 주차 걱정도 없고요.”

    그의 MTB 사랑은 각별해서 2007년에 <행복한 자전거>라는 책을 냈고, 자전거 관련 강연도 여러 번 했다. 1997년에는 ‘도전 지구탐험대’란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MTB경기에 출전, 아마추어 마스트급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국내 대회에서도 수회 입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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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5월, 인수봉 등반 때. 후배의 꼬임에 넘어가 무작정 고독길로 올랐다가 혼쭐이 났다. 장비를 구입할 틈이 없어 자전거 헬멧을 그냥 쓰고 나갔단다. / 사진 김세환 제공.
    Q 자전거 모임도 만드셨죠.

    A “네, ‘한시반클럽’이라는 모임이에요. 같이 자전거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1시 반 정도 되거든요. 한창 때는 지리산 노고단도 MTB를 타고 올라갔었어요. 벽소령 올라갈 때는 장마에 길이 유실된 거예요. 거기까지 가서 되돌아올 수 없어 어깨에 메고 기어코 대피소까지 올라갔어요. 거기 있던 분들이 우리를 좀 정신 나간 사람 보듯 쳐다보시더라고요. 서울에서 속초까지 자전거로 횡단하는 것도 우리가 거의 처음이었어요. 새벽 5시에 제3한강교에서 모여서 출발했는데 그때는 길이 구불구불 안 좋으니까 저녁 6시가 다 돼서야 미시령에 도착했어요. 요즘도 컨디션 좋으면 하루에 양재동에서 행주대교까지 왕복 80km 정도 타죠. 그런데 나이는 못 속이나 봐요. 예전엔 내가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야, 빨리빨리 좀 와라’ 했었는데 요즘은 제가 뒤에서 ‘얘들아, 천천히 좀 가자’고 할 때가 더 많아요.”

    그는 4대의 MTB와 로드바이크를 가지고 있다. 한눈에 봐도 고가인 자전거들이지만 정작 그는 “자전거가 가볍고 기능도 많으면 물론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전거의 가장 좋은 부품은 안장 위의 사람이고,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제일 잘 타는 사람은 ‘안 다치고 오래 타는 사람’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삶, 예술, 자연… | 가수 김세환]
    통기타를 든 모습 못지않게 등산복과 배낭이 잘 어울리는 그는 항상 현관 앞에 자전거와 배낭을 대기시켜 두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해놓는다고 했다.
    Q 등산도 좋아하시죠?

    A “겨울에는 MTB 타기 조금 추우니까 클럽 사람들과 등산을 시작했죠. 그러다가 2009년 5월에 클럽 후배가 ‘형은 하체가 튼튼하니까 인수봉도 올라갈 수 있을 거야’라고 꾀는 거예요.  순진하게 ‘그래?’하고 따라갔죠. 그런데 거기는 갈 데가 아니더군요. 제일 쉽다는 고독길로 갔는데도 무지하게 힘들었어요. 도중에 내려오는 게 더 힘들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올라갔어요. 영자바위 올라가느라 바지가 다 해졌어요. 그래도 정상에 서니 정말 좋더라고요. ‘이 세상에는 인수봉을 오른 사람과 못 오른 사람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자전거 타는 후배들한테 ‘너 인수봉 가봤냐?’ 하면서 자랑해요. 하하.”

    Q 현관 앞에 미리 꾸려놓은 등산배낭이 놓여 있네요. 제대로인데요.

    A “그럼요. MTB도 그렇지만 야외 활동할 때는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해요. 그게 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예요. 그래서 등산할 때 옷을 잘못 입고 온 분들이 있으면 베이스레이어, 미들레이어, 재킷 입는 방법을 알려줘요. 고어텍스는 언제 입고 윈드스토퍼는 언제 입고, 등산스틱 잡는 법은 이렇고, 등산화 줄은 올라갈 때 내려갈 때 각기 다르게 매고 등등을 설명해 드려요.”

    Q 등산학교 강사님께 강의 듣는 기분이네요.

    A “하하, 그래요? 등산은 자만하거나 과욕을 부리면 반드시 사고가 나요. 등산장비도 마찬가지예요. ‘별일 있겠어?’ 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갖추지 않고 산에 가면 위험해요.”

    Q 역시 아웃도어 1세대다운 충고시네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A “계속 노래하면서 MTB도 타고 싶어요. 지방 공연 갈 때는 미리 자전거를 싣고 가서 그곳에서 하루 정도 타고 그 지역 음식도 먹고 여행지도 둘러보고요. 좋잖아요. 언제나 지금처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거예요.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냐마는 예나 지금이나 저는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의 첫째 조건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는 인터뷰를 마친 후 기자에게 본인의 CD앨범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꼰대’ 노래 들으려나?”라고 농을 던졌다. 스스로를 ‘꼰대’라고 말하지만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즐거운 삶에 대한 신념은 언제나 그를 ‘유쾌한 미소년’으로 붙잡아두고 있다. 그와 함께한 두 시간 남짓은 입담 좋은 동네 형님과 재미있게 수다 떨고 온 기분이었다.

    차에서 그가 준 CD를 틀었다. 밝고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을 닮았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 사랑받은 그 순간 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 스쳐가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김세환 ‘사랑하는 마음보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