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오염 버섯·흙탕물 커피… 삶의 깊이를 맛보다

    입력 : 2017.03.18 00:32

    日 교도통신 기자였던 헨미 요, 1992년부터 2년간 15國 돌며
    기아·전쟁·빈곤 속 식사 관찰… 위안부 할머니들도 직접 만나
    "분노의 맛, 증오의 맛, 슬픔의 맛… 음식 먹다보면 기억도 나눠 먹어"

    먹는 인간 책 사진
    먹는 인간

    헨미 요 지음ㅣ박성민 옮김
    메멘토ㅣ364쪽 | 1만6000원

    연회장에서 먹고 버린 지 사흘 된 쌀밥(방글라데시), 방사능 오염 버섯으로 만든 스튜(우크라이나 체르노빌), 가다랑어로 만든 고양이 사료(태국)….

    일본 교도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던 저널리스트 헨미 요(邊見庸·73)가 1992~ 1994년 15개 국가를 돌아다니며 맛본 음식 중 몇 가지를 꼽았다.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니 얼핏 미식 기행이거니 했다면 충격받을 리스트. 방글라데시의 빈민촌, 내전으로 파괴된 구(舊)유고의 마을, 에이즈가 창궐하는 우간다, 독일 교도소와 러시아 해군 막사로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따지지 않고 갔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랬다. "형이하학적이며 까닭 없이 애잔한, 오감에 의존해 '먹다'라는 인간의 필수 불가결한 영역에 숨어들어 보면 도대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진짜 음식을 찾는다. 예리한 관찰과 차분한 서술로 '이런 삶의 모습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삼시세끼는 관성적인 식사가 아니라 영혼을 나누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언젠가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만 집중했던 우리 사회에 필요한 처방전이기도 하다. 23년 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먹는 행위에 관한 이 책은 '분노의 맛', '증오의 맛', '슬픔의 맛'을 이야기한다.

    인종청소가 일어났던 구(舊)유고에서 그는, 세르비아 청년에게 남편과 아들을 잃은 크로아티아계 72세 할머니가 레잔체(국수의 일종)를 만드는 장면을 보고 적는다. "밀가루와 달걀과 소금을 큰 손으로 반죽한다. 둥글게 만들어지면 국수방망이로 널찍하게 편다. '물은 한 방울도 넣으면 안 돼.' 그렇게 혼잣말을 하지만 물은 이미 들어갔다. 눈물이 똑똑 밀가루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수프에 넣을 레잔체(국수의 일종) 반죽을 빚고 있는 안나 스모야크(촬영 당시 72세). 저자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기억을 나눠 받았다’고 썼다. /메멘토

    그의 관찰력은 베트남 호찌민시(市) 노점에서 쌀국수 먹는 데 걸리는 시간도 놓치지 않는다. 일본 샐러리맨이 우동 한 그릇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분. 저자가 베트남 특파원으로 일하던 3~4년 전엔 베트남 사람들이 쌀국수 한 그릇을 12~13분 정도에 비웠는데 다시 찾았을 때는 식사 시간이 9분으로 줄었다고 한다. 국수 한 그릇 먹는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 만큼 경쟁에 노출됐다는 얘기다.

    현지인과 현지 음식을 함께 먹는 게 원칙이었다. 1000년 동안은 인간이 살기 적합하지 않다는 체르노빌 원전 30㎞ 이내 마을로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채취한 버섯으로 끓인 수프를 먹고, 현지 작물로 빚은 술을 함께 들이켠다. 미얀마에서 밀려난 로힝야족 난민촌에서는 통역이 비위생적이니 먹지 말라는 피타(쌀가루로 만든 빵)를 먹고 에티오피아에서는 흙탕물로 끓인 커피를 마신다.

    가장 인상적인 만남은 그가 직접 먹을 수 없었던 음식 덕분에 이뤄진다. 2차대전이 끝나고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원주민의 인육(人肉)을 먹으며 연명했던 일본군 30명의 자취를 찾아나선다. 위안부 할머니 세 분을 만나서는 당시 먹었던 좁쌀밥과 우동 이야기를 듣는다. 저자가 먹어볼 수 없는 음식. 그러나 그제서야 그는 쓴다. "그 기억을 더듬어 악몽과 환상을 이 입으로 씹어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처절하고 깊디깊은 드라마의 한 단편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고요한 기억 속 우물에 돌멩이라도 던지듯,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죄 많은 행위였다." 가해자의 후예인 그가 이들과 소통하는 데도 '함께 먹는다'는 과정이 있었다.

    헨미는 여행을 떠나며 일본이 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나라 전체가 대인 기피증을 앓고, 투명한 항균 벽으로 격리되지 않으면 주변 세계와 도저히 함께하지 못하는 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가 진단한 기피증은 일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초판이 나온 지 23년이 지났지만 일본 과거사 문제는 현재형이고, 로힝야족은 난민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교 분쟁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18세기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은 '미식 예찬'에서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먹는 법을 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반박한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누구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나갈 수 없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는 일단 그의 음식을 먹어보는 건 어떨까. 저자는 "수천 개의 입과 위장 속에 채워지는 것은 사상도, 주의도, 주장도 아닌 음식뿐"이라고 썼다. 부제는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