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장악한 두목, 마키아벨리의 잔혹한 '군주' 닮아"

    입력 : 2017.03.20 03:02

    [영화 '프리즌'의 배우 한석규]

    교도소서 온갖 범죄 저지르는 죄수들 우두머리 '정익호' 역
    극악무도한 악역 연기 보여줘

    "이번 연기 점수 매기자면 65점"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대왕이나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배우 한석규(53)는 절반의 얼굴만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TV 브라운관에서 영화 스크린으로 장르를 옮기면, 한석규의 또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넘버3'의 껄렁한 삼류 깡패부터 '구타유발자들'의 악질 교통 경찰, '주홍글씨'에서 불륜으로 인해 파멸로 치닫는 엘리트 형사까지…. 그가 출연했던 영화 23편 중에서 악역(惡役)을 맡았던 작품의 비중은 적지 않다.

    23일 개봉하는 '프리즌'(각본·감독 나현)에서 한석규는 잔인성이나 파괴력 면에서 출연작 가운데 상위에 오를 만한 악역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가 맡은 '정익호'는 겉으로 보기엔 착실한 모범수 같지만, 교도소 안팎을 넘나들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죄수들의 우두머리다. 17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한석규는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수컷 하이에나를 연상했다"고 했다. "한쪽 눈알이 빠지고 살가죽이 찢겨나가서 절뚝거리면서도 본능 하나로 살아남는 짐승의 이미지를 줄곧 떠올렸다"는 것이다.

    영화는 '수감자들이 자유롭게 감옥을 넘나들면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역발상에서 출발한다. 한번 처벌받았기에 용의자 명단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경찰 수사의 허점을 찌르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의료 사고를 저지른 의사부터 뺑소니 혐의로 구속된 형사와 금고털이범까지 온갖 '전문가 집단'으로 가득한 곳이 교도소다.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형사가 범죄 집단 속으로 잠입한다는 설정은 '무간도' 연작과 닮았고, 초심자인 주인공이 악당인 고수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작품 구조는 무협이나 서부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극히 만화적 상상력인데도 여기에 현실적인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이 한석규의 연기다.

    영화 촬영을 앞두고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예전의 통치자상(像)에서 벗어난 이 책을 통해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백성을 완벽하게 복종시키는 군주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교도소장을 뇌물로 길들이고, 조폭 출신의 죄수들도 카리스마로 제압하는 '정익호'는 마키아벨리의 비유처럼 "사자의 힘과 여우의 책략"을 지닌 군주와 닮았다.

    '프리즌'에서 한석규는 톤을 높이는 법 없이 느릿느릿하고 울림이 강한 목소리로 영화의 흐름을 단숨에 낚아챈다. "난 이 안에서 세상을 굴릴 거다"처럼 아드레날린 넘치는 대사를 그가 천천히 내뱉는 순간, '정익호'의 포악성은 현실감을 얻는다. 한석규는 "바보 같은 말처럼 들리겠지만, '어떻게 하면 연기(演技)를 하지 않을까' 그 생각만 했다. 어려운 수식어를 붙여서 화려하게 꾸미지 말고, 비워내고 덜어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국민 배우' 같은 수식어가 붙은 지도 꽤 오래됐다. 하지만 한석규는 자신의 연기에 박한 평가를 내렸다. '프리즌'의 연기에 대해 스스로 매긴 점수는 65점. "모든 연기자에게는 자학적 면모가 있다"고 했다. 자신의 출연작 중에서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최고 점수(80점)를 줬다. 그 순간 시한부 노총각 '정원'(한석규)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다림'(심은하)을 바라보며 창문으로 서서히 손가락을 가져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외국 영화 중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국내 영화 중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1980년작 '짝코'에 모두 90점을 줬다. 그는 "'짝코'는 반공 영화 같지만 한국 현대사가 모두 담겨 있는 걸작"이라며 "언젠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배우에 대해 "사람의 인생을 희망이나 고통을 통해서 표현하는 직업"이라며 "가급적 고통보다는 희망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대사를 외우듯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말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악역을 맡은 배우의 말 치고는 무척 역설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