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만들땐 산산조각 납니다, 배우도 저도"

"배우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말하는 감독을 본 적이 있는가. 재일 동포 이상일(43) 감독이다. 그런데도 최고 배우들이 줄을 선다.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분노' 역시 마찬가지. 일본 최고 배우들이 무더기로 출연한다. 22일 만난 이 감독은 "배우가 자신의 방법론을 입고 오는 경우, 벗겨낼 수밖에 없다"며 칼로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직접 가루를 내버리는 배우도 있고, 안 보는 척하면서 기계에 넣고 버튼만 눌러 갈아 버리는 배우도 있지요. 제대로 분별해서 부숴야 합니다." 표정이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초현실적이다.

영화 '분노'는 작년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 각 부문 최우수·우수상 14개를 받았다. 이 감독은 "일방적으로 배우를 산산조각 내는 건 아니다. 도달할 목표를 향해 나도 함께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다.

무더운 여름의 도쿄, 평범한 중년 부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벽에 피로 쓴 '노(怒·분노)' 한 글자가 유일한 단서. 1년 뒤, 도쿄·지바·오키나와에 연고를 알 수 없는 세 남자가 나타나고, 주변 사람들은 그 남자가 살인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너진다. '인셉션'의 와타나베 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쓰마부키 사토시, '데스노트' 시리즈의 마쓰야마 겐이치,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의 미야자키 아오이, '바다 마을 다이어리'의 히로세 스즈…. 신(新)·구(舊)를 망라한 초호화 캐스팅이다.

모두가 이전 출연작과는 전혀 다른 면모. 감독은 말했다. "청순한 첫사랑 이미지의 여배우 미야자키 아오이는 유흥업소에서 학대당하다 구조되는 설정이어서 실제로 유흥업소 체험을 보냈어요. 유부남 쓰마부키 사토시는 동성애자라는 설정이어서 상대역과 2주간 같이 살게 했고요."

홍콩의 한 신문은 이번 영화를 "인간 정신(psyche)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채굴한다"고 평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하나로 엮이는 스타일은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2007)을 떠올리게 한다. 감독은 "이냐리투 감독을 정말 좋아하지만, '분노'에서는 그보다 관객이 끝까지 그 누구도 범인이 아니길 바라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끝까지 관객과 줄다리기를 벌이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큰 참고가 됐습니다."

관객은 후반부로 갈수록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는다. "희망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견해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누군가는 분노에 지배당하고, 누군가는 사랑일지 모르는 감정을 매개로 분노에서 빠져나오며, 누군가는 죽을 힘을 다해 자기 안팎의 분노와 폭력에 맞섭니다."

배우 와타나베 겐은 "이상일 감독은 일본 영화의 보물"이라고 했다. '민족적 정체성보다 영화감독의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감독은 분명 재일 동포 영화인 중에서도 독특한 존재다. "동포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만 동포로서 정체성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재일(在日)'로 살아온 증거와 영향은 제 영화 속에 충분히 녹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