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오피니언] 홍덕이 밭

    입력 : 2017.04.03 10:21

    겨울은 분명 갔건만 봄이 오지 않은 듯하다. 사방에서 움이 트고 꽃이 피어나려 하는데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라는 고사성어 그대로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이렇게 해도 걱정, 저렇게 해도 걱정이다. 한고비 넘으니 또 한고비요, 어수선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인들과 만나 서로 털어놔 봐도 별수가 없다. 그렇다고 신경을 끌 수도 없고, 꺼서도 안 될 노릇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배는 자칫 기울지도 모르는데, 선장을 하겠다는 이들의 외침이 어지러운 요즘이니 그렇다.

    점심 모임 후 차를 마시러 간 곳에서 옆 테이블의 대화 한 자락이 귀에 들어왔다. “우리 같은 전업주부들이 제발 살림 얘기나 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 요새 모였다 하면 정치 얘기가 심각해지니 말이야.” 나 또한 정치를 잘은 몰라도, 국민이 정치에 대한 근심을 잊고 생업에 열중하게 해야 잘하는 정치란 건 안다.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하고 새 사람을 뽑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누가 되든 차기 정부가 갈 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안보, 외교, 경제, 교육 모든 게 첩첩산중인 국가적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답답함을 떨치고자 집을 나서 머지않은 낙산 공원으로 향했다.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을 길게 잇고 있는 한양도성의 운치가 푸근한데다 지대가 높아 가슴이 뻥 뚫리는 바람 맞이에 그만인 곳이다. 저 멀리 북한산의 백운대는 하얀색 고깔모자를 쓴 양 화강암 봉우리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일순 마음이 시원해지는 듯하다. 성곽을 따라 공원 산책로를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웬 팻말이 눈에 띈다. ‘홍덕이 밭’이다. 조만간 파종을 위해 일구어 놓았는지 울뚝불뚝 엎어진 밭의 속살이 뽀얗다. 팻말에 설명도 들어있다.

    낙산 아래 동숭동에 있던 밭. 병자호란 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심양에 있을 때 따라가 모시던 나인 홍덕이라는 여인이 심양에 있으면서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서 효종에게 날마다 드렸는데, 볼모에서 풀려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 홍덕이 김치 맛을 잊을 수 없어 이에 효종은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대게 했다 하여 낙산에 “홍덕이 밭”이라는 지명이 전해진다.


    불명예 역사

    인조는 망해가는 명을 돕고, 여진족이 세워 후에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은 오랑캐라고 얕잡아보다 침범을 받았다. 왕은 남한산성으로 쫓겨 갔다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고, 왕자들은 볼모로 심양까지 끌려갔다. 거기서 서양 문호를 접하게 된 소현세자는 친청 행위를 했다 하여 독살되고, 둘째 봉림대군이 즉위했다. 조선 17대 왕 효종이 된 그는 심양에서 굶주리던 때, 궁녀 홍덕이가 텃밭을 가꿔 담가오던 김치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홍덕이에게 텃밭을 주고 김치를 담가오게 했던 것이다.

    홍덕이 밭을 보며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새삼 돌아보게 됐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삼전도의 굴욕은 아니더라도 전직 대통령들의 ‘불명예 역사’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난 대통령들이 여럿이었고,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들도 그 말로가 순탄치 못한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주변 환경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통제가 어려운 구조적인 힘에 눌리는데, 과연 어떤 리더를 선택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우리의 살길이 열릴 것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심란한 마음이 중심을 잡게 하는 데는 고전만 한 게 없다 싶어서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에게 들었던 강의 노트를 다시 들춰봤다. ‘노자’의 정치 4단계에 대한 설명이다. 그 첫째가 조짐을 보고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의 정치다. 굴뚝에 구멍이 뚫려서 연기가 조금씩 새어나오면 미리 알아서 막아주고, 생색도 내지 않는다. 국민은 행복하게 잘 살지만, 임금의 덕분인지 모른다. 두 번째는 구멍을 못 막아 불이 났으나 내 집에 불난 듯 끄는, 즉 국민의 일을 내 일처럼 하는 정치다. 세종대왕이 그러했다.

    세 번째는 욕심이 가득한 정치다. 가장 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대통령직이라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통 국민을 위해서만 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에 필요한 힘, 곧 권력은 국민이 고마워해 줘야 쥘 수 있다. 불이 나야 고마워할 일이 생기니, 밤에 몰래 불을 붙이고 그 다음 날 열심히 꺼주는 식이 된다. 최하질은 불을 붙였건만 꺼주지도 못해 국민에게서 막 무시당하는 정치다. 그런데 대개 정치인의 술수는 마지막 두 단계에 속하는 게 세계적인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침묵하는 다수

    이 교수는 이를 위한 9가지 원칙을 ‘중용’ 20장에서 풀어냈다. 첫째, 임금의 임은 님이고, 금은 성스럽다는 의미로서, 임금은 성스러운 님의 마음가짐과 온 국민의 애인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한 사람이라야 한다. 둘째, 정치이념을 확립해야 하고, 셋째, 친인척 비리가 없도록 가족 간 화합이 있어야 하며, 넷째, 국무총리와 장관 같은 고위 공직자들을 우대해야 한다. 내 편이 아닌 각 분야의 일인자들을 찾아내 오래 일을 맡겨서 대통령은 할 일이 별로 없어야 좋다. 세종 때 황희 정승은 우리 역사상 최장수 장관으로 30년을 봉직했다.

    다섯째, 하급관리를 내 몸처럼 아껴서 그들이 국민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게 한다. 대통령을 만날 일이 거의 없는 국민은 주민센터에서 만나는 9급 공무원을 통해 나라를 판단하게 된다. 여섯째, 서민들을 내 가족처럼 여겨서 어려움이 있으면 잠 안 자고 해결한다. 세종은 흉년에 백성이 고생하자 광화문 네거리에 초가집을 짓고 그들의 형편이 피기까지 몇 달이고 거기서 살았다. 일곱째, 기술자를 우대해 우리나라로 오게 한다. 여덟째, 교포들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이웃 나라들과 외교를 돈독히 한다.

    노자와 중용은 지금 우리에게도 깊은 영향과 지극히 현실적인 깨우침을 준다. 그렇다고 나서서 외치지는 않더라도 나라를 걱정하는 침묵의 다수로서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 냉철한 권리행사의 때를 벼르고 있다는 것을 정치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부디 정부와 정치권이 서로 헐뜯으며 이 작은 나라에서 갈가리 찢기는 파당을 일으키지 말고, 한마음으로 위기 돌파에만 전력을 쏟길 바랄 뿐이다. 봄이 지나 홍덕이 밭에서 초록이 쑤욱 자라듯 대선이 지나 나라의 기세가 불끈 솟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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