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기부하는 기업가도 필요해"

"문예지는 병원에 빗대면 병리실험실 같은 곳이에요. 의사들도 돈 버는 데로만 가잖아요. 요새 순수문학 하겠다는 사람 별로 없어요. 글을 좋아하는 나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결호(缺號) 한번 없이 30년 됐다는 게 보람이지요."

에세이 전문 월간지 '월간 에세이'가 다음 달 창간 30주년을 맞는다. 원종성(80) 주간 겸 편집인은 361번째 책인 5월호에 "조촐하고 알찬 잡지를 내고 싶었던 게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이었다"며 "문인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독자를 위한 에세이를 알차게 모으면서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한다"고 썼다. 발행인은 3년 전 아내(피부과 의사)에게 넘겼다. "아이들(2남 1녀)은 '그 골치 아픈 걸 왜 하냐'고 마다하는데 마누라가 거둬줬어요(웃음)."

동양엘리베이터 회장이었던 그는 2004년 독일 회사와 M&A를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월간 에세이'에 전념해왔다. 대기업을 경영할 때도 회장실 옆에 편집실을 두고 직접 교정을 볼 만큼 이 잡지를 애지중지했다. 중역들을 결재 서류 들고 기다리게 하는 바람에 월간지 직원들이 미움을 받기도 했다. 원 주간은 "경제적으론 여유가 있어 책 만들면서 원가 계산은 해본 적이 없다"며 "정신을 기부하는 기업가도 필요하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국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밥 굶어 죽는다"고 부친이 반대해 대학에선 경제학을 전공했다. 중등 교과서에 '나의 자화상' '큰 바위 얼굴'이 실렸던 일급 수필가이기도 하다. 지난 30년간 1만8000명이 '월간 에세이'에 글을 실었다. 기억에 남는 필자를 묻자 "박근혜 전 대통령도 부모 잃은 개인사를 수필에 담아 보내온 적이 있다"며 "번역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윤기씨는 소재가 다양하고 글도 으뜸이었다"고 했다.

30년이면 한 세대가 바뀌는 시간이다. 어떤 문예지가 대중적인 소설이나 시도 아니고 수필만 붙들고 있다는 것은 여간한 집념 아니고선 어렵다. 수필의 매력은 뭘까. 원 주간은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지요. 일상의 무늬를 건져 올리고 삶의 품격을 높여줍니다"라고 답했다. "근년에는 한계에 부딪혔는지 젊을 때처럼 좋은 글이 안 나와서 집필은 접었다"며 빙긋이 웃었다.

한때 10만부 넘게 발행했지만 최근엔 3만부 수준으로 줄었다. 서점에서도 판매되지만 보험사나 군대에서 매월 구매하는 부수가 더 많다고 한다. "제가 직접 판매원으로 나섰습니다. 기업하는 친구들 만나면 커피 마실 돈으로 '월간 에세이' 1부(5000원)를 보라고 해요. 반(半)강매인데 대부분 흔쾌히 응해줍니다."

필자와는 글로만 소통하고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은 30년째 그대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원고를 디자인하고 그림을 얹는 방법을 늘 고민한다고 했다. 미래는 어떻게 구상하고 있을까. 그는 "내가 손 놓은 이후가 고민"이라며 "사명감을 갖고 이어가게 만드는 길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창간 기념회는 열지 않는다. 30년 특별호에는 곽재구 권영민 백가흠 장석남 전성태 정과리 정진규 등 대표 문사들이 축사를 보내왔다. 원 주간은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지만 내가 돈·명예를 멀리하고 좋은 책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