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을 추모하며

    입력 : 2017.05.11 17:01

    보재 이상설 선생, 우리에게 어찌 기억되고 있을까? 누구나 다를 테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아니 내게 습득된 지식을 차례로 망라할 때, 세 번 놀라는 기회를 맛보았다.

    어릴 때, 초중학교에서 배운 역사를 돌아보면, 이준 열사께서, 고종 황제의 밀지를 갖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복 자살’(당시의 알려진 사실)하셨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우리 가슴을 요동치게 하며 오랫동안 뇌리에 각인됐었다.

    그 어려운 환경과 여정 속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열강의 외면 속에 참석조차 못하고 분통이 터져 분사하셨다거나 병사하셨다거나 하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대목이 될 수 없었다. 그 후 내 고장 진천에서 태어나신 보재 이상설 선생께서 헤이그 특사의 세 분 중 정사(正使)로서, 부사로 이준 열사, 통역을 위한 이위종 선생과 함께 참석하셨단 사실을 알고 무지의 소치를 자탄하였다.

    또한, 이상설 선생께서는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선임되시면서 항일 무장 운동의 기틀을 닦으셨던 투철한 사상가이시며, 중국 용정에 최초의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해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민족교육자이며,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활동 지역이나 업적을 살펴볼 때,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펼치셨단 사실을 알고 늦은 깨달음을 자책하였다.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 행사. /진천군청 제공

    더욱이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실 때,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영혼인들 조국에 돌아가겠는가? 내 육신과 유품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뿌리고 제사도 지내지 마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셨다 하니, 지금도 이 땅을 굽어보시면서 오로지 조국 번영, 나아가 조국통일로서 완전한 세계 속에 우뚝 선 대한민국 건설을 염원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올해로 100년, 선생께서는 1870년 진천에서 태어나시어 1917년, 47세에 돌아가셨다.

    선생의 탄생지인 충북 진천에서는 올 2017년 4월 21일~22일, 100주기 추모식을 비롯하여 각종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선생의 사당인 숭렬사(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는 추모제례약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삼헌관의 헌화 및 분향이 있었고 참석자들의 헌화가 이어졌다.

    이어, 자리를 옮겨 100주년을 계기로 건립이 약속된 기념관 부지에서 추모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추모사, 추모메시지, 영상 상영, 추모 헌시 낭송 등이 이어지고, 끝으로 기념관 건립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시 낭송가가 선생의 삼읍시(三泣詩)를 읊을 때에는 장내 가득히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을 잃어 몸을 우노라! (泣國泣家又泣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