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58) 감독은 약속보다 20여 분 일찍 서울 삼청동 카페에 나타났다.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숨 고를 새도 없이 "반가워요. 자, 얘기합시다" 했다. '왕의 남자'(2005)와 '사도'(2014)를 만든 이 감독, 새 영화를 내놓기 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박열'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의 삶과 투쟁을 스크린에 생생히 되살려낸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왕세자 암살 모의죄로 투옥, 법정에서 '천황제'의 허위와 일제의 조선인 학살을 꾸짖었던 인물. 이 감독은 "제국의 심장 도쿄에서, 문명국을 참칭하는 일제 사법제도를 활용해 그들을 조롱하며 싸워나가는 당당한 젊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우리 영화 속 독립군은 고등계 형사나 경무국장 정도와 싸워요. 눈높이가 너무 낮은 것 아닌가요? 박열의 싸움 상대는 일제 내각과 법원, 왕실이었습니다."
이 감독은 "박열의 삶에는 양식 있는 한·일 양국 시민이 공감하며 일제강점기를 이해할 단서가 있다"고도 했다. 조선 청년 박열과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일본 신(新)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천황제' 반대 논리, 인권·자유·평등에 대한 현대적 개념과 인식을 공유했다. "박열은 '일본 권력에는 반감 있지만 민중에겐 친밀감이 든다'고 말합니다. 옥중 박열에겐 그의 뜻을 잇겠다는 양국 지식인들의 면회가 이어지고요." 이 감독은 "그 시대 인물들의 능동적 삶을 못 보고 사건들만 조각조각 바라보면, '편 가르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 인식이 장차 명확해지도록 공감의 재료를 제공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영화 속에 아사히와 조선일보 등 실제 신문을 계속 넣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반일 영화가 아니라, 과오의 인정과 화해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영화 속 일제 내각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우왕좌왕한다.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가 한 유명 개그맨과 꼭 닮아 보인다"고 하자 이 감독이 한참을 웃었다. "의도적 희화화였지만, 사료를 보면 실제 내각 모습도 비슷했어요. 역사를 지나치게 엄숙하게 보면 진실이 가려집니다. 총독부 경무국장 시절 3·1운동 과잉 진압 책임으로 궁지에 몰렸던 미즈노가 대지진 때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감독은 "역사엔 흐름이 있을 뿐 우연은 없다"고도 했다. "1919년 3·1운동은 그 전 해부터 일본 전역에 광부·농민 폭동이 이어졌기에 가능했어요. 관동대지진 뒤 도쿄 우에노 공원과 왕궁 앞에 모인 성난 군중을 보며 일제 내각이 두려워했던 것도 그 경험 때문이죠." 박열의 법정 투쟁도 그런 시대 흐름을 읽었기에 가능했다.
이 영화가 빛난다면, 박열 역의 이제훈(32)과 가네코 역의 최희서(30)가 일등공신. 이 감독은 "젊은 배우들이 참 훌륭해서, 나의 그 나이 때를 생각하면 정말 형편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배우가 감정에 취하면 이야기의 본질이 흐트러진단 걸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딱 알아채요. 유아인, 강하늘, 박정민, 이제훈, 최희서…. 우리 영화, 젊은 세대를 보면 무조건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