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는 좁다… 인터넷이 내 무대"

소셜 미디어가 몰고 온 변화의 바람 앞에 패션도 예외일 수 없다. 패션쇼에 초대받는 소수 전문가만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접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최신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모델 아이린(30)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 그는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사진·영상 등 콘텐츠를 제작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리는 전도사. 인스타그램 팔로어(구독자)만 92만명이다.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요즘 패션계에선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부른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작년 아이린을 '차세대 리더' 20인 중 하나로 꼽았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의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 예술 부문에도 연예·스포츠 부문의 지드래곤·김연아와 함께 뽑혔다. 21일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아이린을 만났다. 이곳에서 23일 개막하는 샤넬의 전시회에는 브랜드의 홍보대사인 아이린의 사진도 걸렸다.

처음부터 인플루언서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는 그날그날 제 옷차림이나 일상생활을 블로그에 올렸어요. 그러다가 인스타그램을 처음 써 봤는데 너무 간편해서 자연스럽게 옮겨갔죠. 테크(기술)에 관심이 많아서 새 앱이 나오면 내려받고 써 보는 걸 좋아해요." 아이린은 "지금은 디지털 콘텐츠 전문 제작팀이 동행하지만 처음엔 혼자 영상을 찍고 편집까지 해서 올렸다"고 했다.

2012년 모델로 데뷔한 아이린은 국내 대표적 패션쇼인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서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본격적으로 인플루언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4년 무렵부터다. 분홍·보라·무지개색까지 넘나드는 머리 색깔, 남성복과 여성복 느낌이 섞인 독특한 스타일로 팔로어를 늘리자 패션 브랜드들도 그를 주목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패션 행사에 모델로 세우는 대신 아이린의 눈으로 본 현장을 영상·사진으로 알리는 역할을 맡겼다. 샤넬·막스마라·마크제이콥스·H&M 등 명품부터 SPA(패스트 패션)까지 다양한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인기의 비결로 아이린은 '친밀감'을 들었다. "행사 가려고 호텔 방에서 준비하는 모습, 미용실 가는 차에서 김치찌개로 후다닥 점심 먹는 모습까지 그대로 올리거든요. 다른 데서 보기 힘든 이런 모습을 팔로어들이 재밌고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패션 잡지는 아무래도 좀 멀게 느껴지잖아요."

타임지는 아이린을 소개하며 "팬들이 브랜드의 쇼룸이나 패션쇼 앞줄에 함께 있는 듯 느끼게 한다"고 했다. 유대감을 준다는 의미다. 실제로 많은 팔로어가 그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른다. 'Unnie'(언니)라고 댓글을 다는 외국 팬들도 있다.

아이린은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오가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멋쟁이였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할머니 서랍에서 액세서리를 하나씩 꺼내 걸쳐 보고 립스틱을 바르며 놀았어요. 패션 쪽 일을 하겠다는 꿈이 생겼죠." 열다섯 살 때 한국에서 모델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프로필 사진까지 찍었지만 "컴퓨터로 고친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업그레이드'(성형수술)하자는 바람에 겁이 나서 그만뒀다"고 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FIT(뉴욕패션기술대)에서 직물 디자인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모델로 정식 데뷔했다.

그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아이린처럼 되고 싶은 후배들의 콘텐츠 제작을 도와준다거나 신인 디자이너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해서 한국의 패션 인재들을 알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가 더 성공해야겠죠?(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아이린 인스타그램에 접속하자 전시장에 도착해 찍은 사진이 새로 올라와 있었다. 벌써 2만개 가까운 '좋아요'가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