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탐방] [17]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입력 : 2017.08.08 09:43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한자명칭 :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지 정 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 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 받침돌을 얹어 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의상대사(義湘大師)와 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의 부석(浮石)은 뜬 돌이다. 즉 공중에 뜬돌이 세운 절을 말한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가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한 절이다.

    의상(義湘)은 신라의 진골 귀족 출신으로 선덕여왕 13년(644)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진덕여왕 4년(650) 8세 연상의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으나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첩자의심도 받았으나 풀려났으며, 문무왕 1년(661)에 다시 두 사람은 유학길에 나섰으나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가 원효는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임을 알고 나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으며, 의상은 결심한 대로 당나라로 넘어갔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의 제자가 되어 8년 동안 머무르며 화엄을 공부하고 당나라가 침략한다는 정보를 듣고 고국 걱정에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낙산사(洛山寺)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세웠으며 그 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浮石寺)를 세울 때 까지 화엄 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이 알려졌지만, 화엄 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전하기 위하여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인 부석사, 미리사(美里寺), 화엄사(華嚴寺), 해인사(海印寺), 보원사(普願寺), 갑사(甲寺), 화산사(華山寺), 범어사(梵魚寺), 옥천사(玉泉寺), 국신사(國神寺)를 비롯하여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대흥사(大興寺) 등을 세운 것으로 전하여 온다.

    그중 부석사를 세울 때의 전설을 보면 당나라 유학시 머물렀던 등주의 신도 집 딸이었던 선묘 아가씨는 의상을 흠모하였으나 불교에 귀의한 처지임에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고 그의 뜻을 펼치는데 신명을 바치리라 결심 후,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떠나는 날 부두로 달려갔지만 이미 배는 떠난 후인지라 그에게 주려고 정성껏 지은 옷 보따리를 바다에 던지니 풍랑이 배에 전하여 주었으며, 낭자 본인은 용이 되어 대사의 배(船)를 호위하리라고 서원 후 몸을 바다에 던지니 소원대로 용이 되어 무사귀환을 호위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 왼쪽 뒤편의 부석(浮石). 누군가 실을 풀어 밑으로 넣어보니 걸림이 없이 돌아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후 전국을 다니던 의상이 태백산 밑에 지금의 부석사를 지으려고 보니 오백이 넘는 떼강도 무리가 먼저 머물면서 물러나지 못하겠다고 버티니 선묘 낭자가 사방 십 리가 넘는 거대 바위로 변하여 하늘에 둥둥 떠다니며 떨어질 듯 말듯 위협하니 도적무리가 겁에 질려 물러나고 의상이 이곳에 무사히 절을 짓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부석(浮石), 뜬 돌이 지은 절이라고 전해오는 것이다.

    실제로 부석사 무량수전 왼편 뒤쪽에는 지금도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바위가 떠있는 듯 얹혀진 듯 놓여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앞 석등(石燈)

    부석사는 비탈진 경사면에 절을 세워 거대한 석축을 여러 단으로 올려 쌓은 구조를 보인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불교의 교리에 입각한 구품 만다라를 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가장 높은 곳에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부석사의 주전(主殿)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고 그 앞마당에 이번에 소개하는 국보 제16호 석등이 서 있다.

    표를 끊고 초입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당간지주가 서 있고 천왕문을 지나 종무소 앞마당의 삼 층 쌍탑 가운데 계단으로 올라서면 앞쪽은 팔작지붕, 뒤쪽은 맞배지붕 형태를 띤 범종루 아래를 지나게 되는데 이제 절반쯤 올라온 셈이다.

    이어서 지금까지의 진입로에서 약간 동남쪽으로 빗각을 틀어앉은 안양루가 보이는데 안양루(安養樓)의 안양(安養)은 극락을 의미하니 이제 곧 최종 목적지 극락이라는 뜻인바, 안양루의 1층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선 후 다시 몇 개의 계단에 올라서야 한다.

    범종루를 지나면 이승만 전 대통령 친필 부석사(浮石寺)현판과 안양문(安養門) 현판을 건 2층 누문(樓門) 안양루가 보인다.
    안양루 아래로 들어서면 몇 개의 계단에 올라서서 빠져나오는 구조인데 머리를 들면 석등과 무량수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단에 올라서면 아미타불을 모신 주전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석등(국보 제17호)이 보인다.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석등 하나만 서 있을 뿐, 다른 아무런 구성이 없다. 석등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묵직하다. 방형(네모꼴)의 배례석(拜禮石)을 앞에 둔 이 석등을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 석등으로 함에 부족함이 없다.
    앞마당에 완전히 올라서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석등, 방금 머리를 숙이고 올라온 안양루 2층이 보인다.

    석등은 높이가 3m쯤 되는 크기이며 네모난 받침돌에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을 갖추어 화사석을 받친 후 지붕돌이 온전히 남아있고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어 간단한 장식이 남아있는 전형적인 신라 석등 모습이며 석등 앞에 놓인 배례석 또한 큼직하면서도 우직한 모습으로 석등을 배향하는 자리에 놓여 있어 완벽한 세트를 이룬 모습이다.

    석등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화사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팔각형 중 네 곳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나머지 네 곳에는 보살입상이 부조(浮彫) 되어 있는데 화창에는 주변에 구멍이 12개씩 뚫려있어(한쪽에만 14개) 개폐장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보살 조각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어깨에 늘어뜨린 채 두 손을 모으거나 천의를 잡거나 연꽃과 보주를 들고 서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다.

    팔각 옥개석은 삿갓형태로 짧고 경쾌한 처마와 상륜부에 장식은 없어진 채 노반과 보주가 솟아 올려진 모습이 꼭대기에 남아있다.

    석등의 화사석과 옥개석. 팔각 중 네 곳은 화사창을 내고 네 곳은 보살상을 새겼다.
    네 곳에 새겨진 보살상 모습(부석사 홈피 사진). (왼쪽부터)남동쪽, 남서쪽, 북동쪽, 북서쪽 순서이다.

    네모난 지대석은 각 면에 안상이 2개씩 새겨진 역시 네모난 1층 하대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의 2층 하대석은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으로 8각 끝마다 귀꽃을 장식하였다. 그 위의 팔각 중대석(간주석)은 아무런 장식이나 부풀린 모습 없이 담백하게 쭉 뻗어 올라 상대석을 받치는데 상대석은 앙련 연꽃잎이 피어올랐고 꽃잎마다 보상화 무늬를 새긴 채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석등의 하대석 부분. 안상과 연꽃잎, 귀꽃의 모습이 큼직하면서도 단순하게 새겨져 장식적이지 않아 보인다.

    부석사에는 위 석등 외에도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이 있어 계속 소개해야 한다. 한 절에 5개의 국보를 가진 경우도 드물거니와 이러한 국보나 보물의 개수나 보유 여부에 못지않게 무량수전의 목조건물로서의 값어치 또한 전 국민이 알고 있는 터, 부석사의 선묘낭자 전설이나 의상대사와 관련한 설화들만 나열해도 한 수레 분량의 책이 모자랄 판이다. 거기에 의상대사와 그 이후 부석사를 지켜온 고승 대덕 스님들의 화엄 사상이나 교리적 말씀과 불경들을 논하거나 청하여 들으려 하면 임시 출가하여 절집 생활을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부석사는 한두 가지 이야기로 이해되고 접수될 절집이 아니다. 그중 필자가 찾아낸 신기한 것 한 가지를 소개하면 현현불이다.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한다 하여 현현불이라고 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구품만다라를 상징하는 대석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무량수전 공간으로 진입하는 안양루부터는 기존의 중심축보다 남동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고 설명하였다.

    부석사 중심축에서 동남향으로 비켜나면 그제야 무량수전과 안양루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향임을 볼 수 있는데 이 방향에서 다포식 건물인 안양루의 포와 포사 이에 음영으로 생긴 여섯 부처님이 보인다.
    위 사진에서 잘 안 보인다면 불심이 없다고 자책하지 말고 안양루에 좀 더 다가서서 누각 밑으로 보이는 2층의 뒷면 공포와 공포 사이 여백 부분, 이곳은 오히려 공포가 검게 보이고 여백이 밝게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역시 여섯 부처님 모습, 현현불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그 이유가 분분하지만 그중 기존의 중심축과 안양루, 무량수전 축이 바라보는 산봉우리 즉, 주산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무게를 받고 있다 하니 참고로 하고 종무소의 반대편, 성보박물관 쪽에서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바라보면 두 건물이 정확하게 겹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그림에서 안양루 공포와 공포 사이, 그러니까 건축물의 여백의 그림자를 힘주어 바라보면 오히려 그 부분이 솟아오르면서 앉아있는 부처님 여섯 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이를 현현불이라고 하는 것이다.